“널 향해 창을 내리, 바람 드는 창을” 산울림이 부르고 아이유가 다시 부른 노래 ‘너의 의미’에서 창문은 대화와 연결, 사랑과
관계의 의미로 등장한다. 노래 가사가 아닌 일상에서의 창문 또한 실로 그렇다. 창문은 소통과 관계의 상징이고 바람은 물론 빛과
의미, 심지어 마음이 통하는 통로이다. 뿐만 아니라 종종은 삶과 생활을 투영하는 액자가 되기도 하며, 건물과 거리에 리듬을
만들어주거나 생활에 표정을 더하기도 한다. 건축 요소, 인테리어 디자인 요소로서의 창문은 단순한 ‘구멍’ 그 이상이다.



 


잘 느껴지지 않지만, 창문은 건축의 기본적인 구성 요소다. 모든 건물에 창문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거의 모든 집에는 창문이 있다.
심지어 컨테이너 박스조차 ‘집’으로 사용하는 경우라면 창문을 만들어 넣는다. 적어도 창문이 있는 건물이라면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건물이라고 여겨도 될 것이다. 창문이 이렇게도 건축과 생활에 중요한 이유는 창문이 소통의 창구이기 때문이다. 실내와 실외의
사이에서 소통과 경계를 만들기 때문이다. 특이한 것은 소통과 경계의 창구이면서 사람이 드나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장 초라한 집에서조차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창문이다. 창문이 소통과 경계의 창구인 것은 몸이 문을 넘어 실내로 들어가기 전 혹은
몸이 문을 넘어 실외로 나가기 전에 이미 시선이 창문을 통해 실내로 혹은 실외로 넘어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느 건물을 가더라도,
어느 건물에서 나가더라도, 몸보다 먼저 시선으로 경계를 넘어가곤 한다. 같은 이유로 가장 초라한 집에서도 가장 먼저 창문을 통해 실내를
살피게 된다. 창이 언제 어디서나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어로 창문(Window)은 고대 스칸디나비아어 빈드(Vind, 바람)와 아우가(Auga, 눈)가 합쳐진 말이다. 풀이하자면, ‘바람 눈’이 될 것이다.
눈이라는 이름이 붙어있기 때문일까, 창문은 다양한 표정을 만들어 낸다. 친절해 보이는 표정이 있기도 하고 가끔은 새침데기 같아 보이는
표정이 있기도 하다. 다양한 표정의 건물이 모인 거리는 그래서 리듬감이 있고, 활기가 넘친다. 반면, 똑같은 표정을 지은 건물들은 그래서
지루하거나 가끔은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처음부터 창문이 지금과 같은 역할을 한 것은 아니었다. 집에서 불을 피울 때 생기는 연기가 빠져나가도록 지붕에 작은 구멍을 뚫은 것이 인공적인
창문의 시작이었다. 아직도 흔하게 쓰이는 오큘러스(Oculus, 눈・둥근 창)가 창문의 첫 형태였던 셈이다. 처음 창문을 만들자, 매캐한 연기가
빠져나간 자리에는 신선한 공기가 들어왔고, 낮이면 따듯한 태양 빛이 들어왔다. 처음부터 창문은 실내와 실외의 바람과 빛이 소통하는 창구로
시작했다. ‘바람 눈’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 어쩌면 이런 까닭 때문일지 모르겠다.



 


초창기의 창문은 벽에 난 단순한 구멍이었고 기껏해야 가죽이나 나무로 덧대어 놓은 정도였을 것이다. 아직 유리를 세공하는 방법이
개발되지 않았고, 건물을 지탱하는 벽에 구멍을 뚫어야 한다는 기술적인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창문은 단순히 ‘구멍’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다 기원전 1세기 로마에서 핸드 블로잉(Hand Blowing) 기법으로 투명한 유리를 세공할 수 있는 방법이 개발되면서 지금과 비슷한 형태의
유리창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처음 만들어진 유리창은 유리병의 바닥을 잘라 벽에 끼워 넣는 형태였다.



 


17세기, 커다란 판유리를 만드는 기술이 개발되면서 창문에 새로운 역할이 더해졌다. 빛과 바람이 통하는 통로에 더해서 조망이라는
새로운 기능이 생긴 것이다. 창을 통해 실내에서 실외의 풍경을 바라볼 수 있게 되자 창문은 거의 액자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됐다.
창문을 통해 보이는 실외의 풍경을 실내의 장식적 요소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커다란 유리창을 통해 한강을 내려다볼 수 있다는 매력으로
한껏 몸값을 올린 서울 아파트의 가격을 생각한다면, 이 새로운 기능과 역할의 가치를 조금은 짐작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네덜란드 영국, 미국 등에서는 오르내리창(Double-hung Window, 내리닫이창)이 많이 쓰였고 나머지 유럽과 그 외의 지역에서는
여닫이창(Case Window) 이 일반적이었다. 오르내리창은 단열에 유리하고 여닫이창은 환기에 유리하다. 창문의 형태가 각 지역의 기후와
환경에 맞게 발전한 덕분이다. 최근에는 시스템 창이라는 이름으로 창문이 완전히 열리지 않는 형태가 많이 쓰이고 있다. 지역의 기후나 환경과
관계없이 냉난방 효율과 추락사고 방지의 목적이 가장 크다.







한국의 창문은 봉창, 바라지문 등 다양한 방식과 형태로 발달하기도 했고 기본적으로 미닫이창(Sliding Window)이 발전하기도 했다. 미닫이창은
여닫이창과 오르내리창의 장점을 고루 갖췄다. 고온다습한 한국의 여름에도 적합하고 추운 겨울에도 적합하다. 창살만 있고 유리나 종이로
덮지 않아 지속적인 환기와 채광을 추구한 봉창과 여름에는 활짝 위로 제쳐서 열어 두었다가 겨울에는 내려서 벽처럼 쓰기도 한
바라지문은 한국의 기후와 환경에 최적화된 형태이다.



 


건물을 지탱하는 벽에 구멍을 뚫으면 당연히 벽이 약해지고 건물이 무너질 수 있으므로 벽이 무너지지 않도록 지탱하는 인방보(Lintel)라는
방법이 개발됐다. 이 방식의 한계는 창문을 가로로 길게 내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동안은 세로로 창을 길게 내는 기술이 발전했다. 
현대 건축의 아버지로 불리는 르코르뷔지에(Le Corbusier)가 벽이 아닌 기둥으로 건물의 하중을 지탱하는 ‘도미노 시스템’을 제안한
20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창문이 가로로 길어질 수 있었다. 우리에겐 익숙한 가로로 긴 창은 그래서 근대 건축의 상징이기도 하다.



 


르코르뷔지에의 파격적 선도로 창문을 벽 자체만큼이나 크게 만드는 것이 가능해졌다. 통유리벽이라는 창문과 벽의 경계를 허무는 파격적인 
시도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결국 창과 벽은 하나가 될 수 없었다. 허물어진 실내와 실외의 경계가 우리를 너무 불편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다시 창은 벽 안으로 축소되었고, 심지어 최근 들어 점차 더욱 축소되는 추세이다. 다만, 최근의 추세는 실내와 실외 사이의
경계의 문제가 아니라 단열과 에너지 소비의 측면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창문은 각 방은 물론 건물 전체의 냉난방에 큰 영향을 끼친다. 한동안은 조망과 채광을 극단적으로 추구하고자 건물 외피의 대부분을 유리로
두르는 통유리벽(All Glass Curtain Wall)이 유행했다. 이런 방식은 조망과 채광에는 유리하지만, 실내 온도 유지에 막대한 에너지가 필요하다.
최근에는 건물 외부에 유리 대신 단열 성능이 우수한 재료가 사용되고 창문이 다시 작아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오래된 알루미늄 새시는
점차 시스템 창호로 바뀌고 있다. 모두 건물의 냉난방에 사용되는 에너지를 줄이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장 보들리야르는 “창문은 더 이상 공기와 빛의 출입에만 필요한 구멍은 아니다.”고 말했다. 보통 창은 실내와 실외를
나누는 문으로서, 채광과 환기를 위한 빛과 바람의 출구로만 여겨졌지만 실은, 우리가 이제껏 눈치채지 못 한 더 많은 기능과 의미가
담겨있다. 예술적으로 기능적으로 심지어 철학적으로까지 창의 역할은 다양하고, 그 의미가 깊다. 햇살 좋은 날 혹은 비가 창을 두드리는 날
아니면 찬 바람이 창을 스치는 날, 그 의미를 생각하며 창을 통해 전해지는 빛과 공기를 느껴보자.



 

 

기사 노일영

저작권자 ⓒ Deco Journal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