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든지 마음 속에 빨강머리 소녀 하나쯤은 품고 살아 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많은 이들은 초록 지붕 집에 살던 해맑고 명랑했던 소녀로 앤을 묘사하겠지만, 앤은 실은 상처가 많은 사람이었다. 상처가 많았기에 밝은 척 미소 지으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곤 했다. 힘들고 지친 마음을 이고 살아가지만, 다른 사람들 앞에서 애써 괜찮은 척 하는 현대인들 역시 어쩌면 앤과 비슷하지 않을까. 앤을 보며 자신의 어릴 적 모습을 떠올리는 이들도 적지 않을 것 같다. 어릴 적 친구들, 어릴적 다녔던 학교, 어릴 적 학교에서 집에 오며 했던 상상들, 어릴 적 살았던 동네까지. 앤은 그렇게 우리의 과거와 현재를 떠올리게 하는 존재고, 자신과 닮은 앤을 보며 우리는 상처를 조금씩 회복해 간다.
 

 

 

 

 

갤러리아포레 MMM 전시장에서 열리는 <내 이름은 빨강머리 앤>은 마음 속 앤과 함께 살아가는 이들에게 적지 않은 것들을 전달해주는 전시이다. 이번 전시는 <반 고흐 인사이드>, <클림트 인사이드>, <앨리스: 인투더래빗홀>, <슈가플래닛>에 이은 미디어앤아트의 여덟 번째 프로젝트다. 출간 이래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세계적으로 큰 사랑을 받아온 ‘빨강머리 앤(Ann of Green Gables)’을 소재로, 공간 연출, 일러스트, 애니메이션, 설치 작품, 음악, 영상 등을 전달한다. 이번 전시에는 마담 롤리나, 노보듀스, 안소현, 손민희, 박유나, 이영채, 최윤정, 김미로, KATH 등 다양한 작가가 참여해 전시의 보는 재미를 더했다.
 

 

 

불쌍한 고아소녀

 

“절 원하지 않으셨던 거군요! 제가 남자 아이가 아니라서 필요 없으신 거죠! 생각을 했어야 했는데. 이제껏 절 원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모든 게 너무 아름다워서 오래가지 못하리라는 걸 알았어야 했는데. 아무도 정말로 날 원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어야 했는데. 아. 전 어쩌면 좋아요? 울고만 싶어요!” 앤은 고아였다. 또래 친구들도 없이 고아원에서 그저 상상을 하며 시간을 보내야 했다. 아니면 자신보다 어린 아이들을 돌보거나. 초록 지붕 집의 매슈와 마릴라에게 입양되었지만, 사실 그들은 남자 아이를 원했었다는 사실을 알고 앤은 절망하게 된다. 하지만 앤이 그들에게 입양되지 않는다면 부유한 집의 식모로 일을 하게 될 처지였고, 매슈와 마릴라는 마음을 돌려 앤과 함께하기로 결심한다.

 

 

 

 

공상가의 방


“가난하다는 게 위안이 될 때도 있어요. 멋진 것들로 가득 차 있으면, 상상할 여지가 하나도 없으니까. 이 방에 들어왔을 때 상상력이 조금 부족한 방이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어요, 마릴라 아주머니의 깔끔한 성격에 걸맞게, 아무런 장식이 없는 방이었거든요. 그런데 그 생각이 들자마자 저도 모르게, 바닥에는 벨벳 카펫을, 창문에는 실크 커튼을 상상하고 있는 거 있죠?” 앤은 상상력이 풍부한 아이였다. 자신이 원하는 것, 소망과 바람을 끊임없이 상상하며 그 공상 속에서 행복해 할 줄 아는. ‘공상가의 방’ 섹션에는 앤이 상상했음직한 앤의방과 옷이 가득하다. 레이스가 달린 드레스와 원피스, 멋진 카펫이 깔린 방까지. 모두 같이 앤의 방에 앉아 앤이 되는 자신을 상상해보자.
 

 

 

 

낭만가

 

“그렇게 아름다운 곳을 그냥 ‘가로수길’이라고 불러선 안 돼요. 그런 이름은 아무런 뜻도 없으니까요. 음, 이렇게 부르는 게 좋겠어요. 기쁨의 하얀 길. 여러 가지 상상을 할 수 있는 멋진 이름 같지 않아요? 전 장소나 사람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항상 새로운 이름을 지어 붙이고 그렇게 생각하곤 해요.” 앤은 낭만적이었다. 주변의 길, 호수, 나무와 사물들에게 자신이 생각하기에 가장 예쁜 이름을 붙여주고 만족해 했다. 스스로의 이름 대신 코딜리아라고 불러달라고 얘기하기도 했을만큼 말이다. 그는 자연과 사물에 이름을 붙여 세상에 둘도 없는 특별한 것으로 만들어주었다. 가로수길은 어디에나 있다. 그러나 ‘기쁨의 하얀 길’은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 오직 앤에게만 있는 길이니까.
 

 

 

 

 

유령의 숲

 


한 걸음 걸어 들어가면, 의외의 공간이 눈 앞에 펼쳐진다. 스산하고 음침한 기운이 맴도는 이곳은 앤과 다이애나의 상상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유령의 숲’이다. 저녁이 되면 하얀 옷을 입은 여자가 흐느끼며 시냇가를 걷고, 머리 없는 남자와 해골들이 노려보는 숲. 이 숲에서 우리는 어떤 유령들을 만나게 될까? 혹시 숲에서 유령을 만나더라도 무서워하지 말고 말을 걸어보자. 실은 앤과 다이애나가 만들어 낸 상상 속 친구들일 뿐이니까.

 

 

 

 

영원한 친구 다이애나

 

 

“일단 손을 잡아야 해. 원래는 흐르는 물 위에서 해야 하지만, 이 길에 물이 흐르고 있다고 상상하자. 내가 먼저 맹세할게. 해와 달이 사라지지 않는 한, 내 마음의 친구 다이애나 배리에게 충실할 것을 엄숙히 맹세합니다.” 둘도 없는 친구 앤과 다이애나가 영원한 우정을 엄숙히 맹세하는 이 장면은, 영혼의 친구를 꿈꾸는 모든 이들에게 로망처럼 남아 있는 장면이었다. 이곳에는 앤과 다이애나가 주고 받았을 메시지들과, 함께 그렸을 그림들이 여기저기 장식되어 있다. Novoduce가 참여한 일러스트와 EETOTALART가 참여한 앤과 다이애나의 추억 속 공간은 많은 관람객들의 사랑을 받았다.

 

 

 

 

빨강머리

 


빨간색 머리는 앤에게는 큰 콤플렉스였다. “빨간 머리를 가진 사람은 절대로 행복해질 수 없어요. 주근깨나 초록빛 눈이나 제 말라깽이 몸은 상상으로 바꾸어버릴 수 있거든요. 그렇지만 이 빨간 머리만큼은 제 상상으로도 없앨 수가 없어요. 정말 가슴이 아파요. 이건 제가 평생을 안고 가야 할 슬픔이에요.” 이곳은 앤의 콤플렉스를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빨간 머리는 서구권에서는 눈초리의 대상이었다. ‘빨강머리는 불 같은 성격을 가지고 신랄한 말을 많이 한다는 정형성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성적이고 남들보다 생기가 넘치는 사람’이라고. 앤은 그의 머리를 바꾸고자 했지만, 결국 그럴 수 없었다. 현대인들도 수많은 콤플렉스를 지니고 살아간다. 외모, 성격, 혹은 능력. 이곳에는 각자의 콤플렉스를 써보고, 또 지워 버릴 수 있는 체험존이 마련되어 있다.
 

 

 


 

 

 

에이번리의 다정한 이웃들

 

“앨런 사모님은 우리가 항상 다른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주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에이번리의 이웃들 중 앤에게 중요한 영향을 준 여성들에 대해 소개하는 공간이다. 린드부인, 스테이시 선생, 앨런 목사 부인, 조세핀 할머니 등, 앤이 에이번리 여성들을 인터뷰해 관객들에게 전달하는 컨셉으로 공간이 펼쳐진다.
 

 

 

 

 

말할 수 없는 친구, 길버트

 

 

“홍당무! 홍당무!” “이 비열하고 나쁜 놈아! 어떻게 그런 소리를 해.” 그런 다음 ‘퍽!’하는 소리가 났다. (–) “별로 중요하지는 않고, 딱히 말하고 싶진 않지만… 그렇지만… 그 친구는 주관이 뚜렷하고 똑똑하니까, 세상에 대한 재미있는 얘기들을 나눌 수는 있겠죠.” 앤의 훌륭한 라이벌이었지만, 동시에 앤을 ‘홍당무’라고 놀려댔던 길버트. 길버트는 앤에게 몹시 이중적인 존재였다. 어쩌면 길버트는 앤의 첫사랑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마침내, 앤은 길버트를 용서해내고 만다. MMM은 그런 앤의 마음을 추측이라도 하듯, 길버트를 향한 앤의 숨겨진 마음과 상상, 무의식을 드러냈다.
 

 

 

 

 

사랑하는 가족, 매튜와 마릴라

 

 

“매튜 아저씨는 겉보기엔 저와는 정반대일지도 몰라요. 항상 조용한 분이거든요. 하지만 저는 아저씨를 만나자마자 알았어요. 우리가 마음이 통할 거라는 사실을요.” 앤의 말처럼 매튜와 앤은 썩 잘 어울리는 가족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매튜는 늘 조용했고, 앤은 늘 수다쟁이였다. 앤이 자신이 원하던 아이가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된 순간 매튜는 고민에 빠진다. 이 아이를 다시 고아원에 데려다 주기보다는, 자신과 마릴라와 함께 살아가면 어떨까 하고 말이다. 결국 앤의 입양에 회의감을 보이던 마릴라 역시 앤과 함께 하기로 결심하고, 셋은 가족이 되었다. 이곳은 앤과 마릴라, 매튜가 꾸려가는 한 가족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크게 매튜와의 추억을 담은 공간, 마릴라와의 추억을 담은 공간 두 곳으로 나뉜다.
 

 

 

 

 

길모퉁이

 


“앞으로 제 앞에 또 무슨 일들이 생길지 궁금해요. 어떤 영광과 다채로운 빛과 어둠이 펼쳐질지, 어떤 새로운 풍경이 있을지, 어떤 낯선 아름다움과 마주칠지. 새로운 모퉁이 앞에 선다는 것, 정말 설레는 일 아닌가요?”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모퉁이를 마주하게 된다. 그것이 비극일지, 혹은 희극일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앤은 이 모퉁이를 도는 일을 두고 무척이나 설렘을 느꼈다. 우리 앞에 어떤 길모퉁이가 있을까? 자 조금만 더 걸어가보자. 상상도 못한 즐거운 일이 우리를 맞게 될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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