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과 갤러리를 좋아하지 않는 이들에게 전시를 찾지 않는 이유를 묻곤 한다. 돌아오는 대답은 비슷하다. 지루하고, 재미가 없다는 것. 사실 그렇다. 미술관을 처음 가보는 이에게 전시란 오랫동안 서서 걸으며 의미가 와닿지 않는 그림과 캡션만 잔뜩 보다 나오는 일일 것이다. 그것이 설사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나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같은 명작가라도 해도 말이다. 단지 교과서에서만 보던 그림을 실제로 보네, 하는 정도의 느낌 뿐. 그런 이들 또한 대림미술관에서 준비한, 세계적으로 가장 영향력 있는 크리에이터로 꼽히는 디자이너 하이메 아욘(Jaime Hayon)의 전시 《하이메 아욘, 숨겨진 일곱 가지 사연(Jaime Hayon: Serious Fun)》라면 부담 없이 즐기고,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하이메 아욘(Jamie Hayon)은 스페인을 대표하는 스타 디자이너다. 그의 작품에는 이야기가 있다. 그는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오가며 사물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사람들의 감정과 상상을 자극한다. 그래서 그에게는 ‘오브제의 연금술사’라는 별명이 붙었다. 대림미술관은 이번 전시에서 관객들이 평범한 사물들에 숨어있는 판타지를 발견하고, 각 오브제들이 주인공이 되어 저마다의 사연을 들려주는 7가지 공간을 만나게 된다. 디자인, 가구, 회화, 조각, 스케치부터 특별 제작된 대형 설치 작업에 이르는 작품들로 구성된 《하이메 아욘, 숨겨진 일곱 가지 사연(Jaime Hayon: Serious Fun)》을 통해서 하이메 아욘이 초대하는 새로운 세계 속 이야기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전시장의 입구에서 관객들을 반겨주는 것은 엉뚱하고 기발한 아욘의 세계를 대변하는 <그린 치킨(Green Chicken)>이다. 전시의 시작, 관객들에게 환영의 인사를 건네는 <그린 치킨>은 일곱 개 공간에 숨겨져 있는 오브제들의 사연에 대한 궁금증을 불러 일으킨다.

 

 

Crystal Passion

 

 

그린 치킨에게 작별을 건네고 들어선 공간은 온통 새빨갛다. 이곳은 하이메 아욘과 250여 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장인 정신의 전통을 이어온 프랑스 크리스탈 브랜드 바카라(Baccarat)와 협업 끝에 탄생한 공간. 하이메 아욘의 손을 거친 크리스탈은 세라믹이라는 전혀 다른 물성을 지닌 재료와 결합했다. 그는 다양한 텍스처와 두께,컬러를 이용해 열대 과일의 영롱함을 표현하고자 했다. 기하학적 형태의 크리스탈 제품만을 고집해온 바카라와하이메 아욘의 만남은 그래서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파인애플, 석류, 물방울, 골프공 등을 본 떠 만든 형태에 조각 패턴을 입혀, 선명한 빛깔을 칠해 보석과 같은 작품을 만들어냈다.

 

Modern Circus & Tribes

 

 

전통과 현대, 지역과 지역이 만나는 순간을 감상할 수 있다. 이곳에서는 아프리카의 전통 마스크와 의복 등에 영감을 받아 디자인한 7개의 유리 화병 <Afrikando> 시리즈와 6점의 세라믹 화병 세트와 나무 테이블로 구성된 설치 작품 <Mon Cirque>를 감상하게 된다. <Afrikando> 시리즈는 아티스트가 밀워키 아트 뮤지엄(Milwaukee Art Museum)의 《Technicolor》 전시를 위해 디자인한 작품이다. 이는 전통을 지켜가고 있는 베네치아의 유리 공예 전문 브랜드 나손 모레티(Nason Moretti)와 코워킹을 통해 만들어졌다. <Mon Cirque>는 곡예라도 하듯 자유로운 형태의 곡선을 갖춘 화병과, 물결의 모양을 본뜬 듯 만든 상판에 각기 다른 모양을 가진 다리를 결합해 완성되었다. 하이메 아욘은 작품들을 위해 몰드를 사용하지 않고 핸드메이드로 제작했다.

 

 

Checkmate

 

ⓒ 하이메 아욘, 대림미술관 제공
 

공간을 옮기면 거울로 가득찬 방에서 수많은 체스 말들을 만나게 된다. 디자이너가 2009년 런던 디자인 페스티벌(London Design Festival)을 위해 제작한 대형 체스 게임 설치 작품인 <The Tournament>를 소개하는 공간이다. 영국과 프랑스, 스페인의 역사적인 전투로 여겨지는 트라팔가르 해전(Battle of Trafalgar)을 모티브로 삼았다. 그는 이탈리아 유명 세라믹 브랜드(Bosa)의 장인들과 2m 높이의 체스 말 32점을 제작했다. 각각의 말에는 그만의 감성을 담은 그림이 그려졌다. 각 체스 말의 그림은 런던을 대표하는 역사적 건물, 돔, 타워, 첨탑 등을 하이메 아욘만의 스타일로 담아낸 것이다. 해당 작품은 런던 트라팔가르 광장(Trafalgar Square)에 설치돼, 각 말들을 직접 대중들이 움직여 게임에 참여하게 했다. 스페인 출신의 작가가 자국의 패배를 작품화했다는 점에서 우리는 하이메 아욘만의 자유분방함과 작가정신을 동시에 읽어낼 수 있다.

 

Dream Center

 

 

한층 올라가면, 우리는 하이메 아욘이 그린 꿈의 전경들을 만나게 된다. 이곳에 소개된 작품들은 하이메 아욘이 런던 데이비드 길 갤러리(David Gill Gallery)에서 열었던 개인전 《Mediterranean Digital Baroque》의 벽화를 리메이크한 것이다. 이 꿈의 센터에서는 현실과 가상을 넘나드는 하이메 아욘만의 판타지가 펼쳐진다. 마드리드와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스케이트 보드와 그래피티를 즐기고, 밀라노와 프랑스 파리에서 학창시절을 보내며 체화한 다국적 경험들을 기반으로 한 이 작품들에서 우리는 작가의 초창기 시절을 만날 수 있다.

 

Cabinet of Wonders

 

 

걸음을 옮기면 하이메 아욘의 ‘소중한 오브제’들을 만나게 된다. 하이메 아욘의 ‘캐비닛 오브 큐리오시티(Cabinet of Curiosities)’를 재해석한 이 수상한 캐비닛에는 70여점에 달하는 다양한 스케일의 오브제와 스케치북이 함께 전시되어 있다. 눈에 띄는 것은 작가 특유의 유선형 디자인이다. 우리는 이 공간을 통해 자연스레 그만의 작품 세계에 녹아들게 된다. 종이 위에 그려낸 스케치가 3차원의 오브제로 현실화 된다면 어떤 모습일까. 우리는 그곳에서 직관적으로 깨닫게 된다. 캐비닛 선반에 적용된 모션 효과를 통한 연출은 위트 있게 오브제에 영혼을 불어 넣는다. 이 오브제는 대체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어느샌가 작품 속 세계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당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Furniture Galaxy

 

 

 

3층의 마지막 공간. 은하수를 닮은 푸른 공간에 펼쳐진 백색 가구들의 별. 가구 디자이너로서의 면모를 드러낸 공간이다. 프리츠 한센(Fritz Hansen), BD 바르셀로나 디자인(BD Barcelona Design), 마지스(Magis) 등 많은 브랜드와의 협업을 통해 탄생한 하이메 아욘의 가구는 각 브랜드의 전통과 아이덴티티를 배반하지 않고 그 스스로의 개성과 스타일을 덧입혀 만들어졌다. ‘디자인은 사용자의 감성을 건드리고 행복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그의 철학을 단적으로 읽어낼 수 있는 이 공간에서, 우리는 별을 보듯 하이메 아욘의 작품들을 감상하고, 또 감탄하게 된다.

 

Hayon Shadow Theater

 

 


한 층 더 올라가면 보이는 전시의 마지막 공간. 우리는 이곳에서 하이메 아욘이 꾸민 거대하고 드라마틱한 그림자 극장을 만나게 된다. 최초로 선보이는 이 그림자 극장에는 그의 상상 속 캐릭터가 살고 있다. 백색 메탈에 형형색색의 아크릴을 겹쳐 탄생한 개성 있는 설치물들은 빛과 그림자를 통해 살아 움직이게 된다. 이렇게 움직이는 실루엣과 다양한 소리들은 관객들을 단순한 갤러리 속 전시를 넘어 연극으로 초대해낸다. 작품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그림자 극장, 이곳에서 관객은 단지 방관자를 넘어 연극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작품들이 말을 걸어오는 연극의 주인공이 된다.

 

 

 

각기 작품 속에 하이메 아욘이 숨겨 놓은 이야기를 다 듣고 나면, 관객들은 전시를 다 관람한 이후에도 한동안 디자이너가 펼친 마법 속에 빠져있게 된다. 다양한 작품 속의 이야기가 즐거웠다면, 어서 서랍 속에서 자신만의 스케치북을 꺼내 보자. 어느 순간 스케치북 속에서 손짓하고 있는 당신들만의 오브제를 만나게 될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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