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과 문으로 구분되는 가정 내의 많은 공간 중에서도 서재는 가장 지성적이고 내밀한 공간이다. 누군가의 서재를 상상해보자. 서재에는 주인의 존재를 정의하는 물건이 가득할 것이다. 책장에 꽂힌 도서들은 주인의 관심사와 지적 수준을 드러낼 것이고 장식품과 예술 작품은 주인의 취향과 추구하는 미적 지향을 보여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서재는 가정 내의 다른 공간과는 다르게 일, 업무와 관련이 깊은 곳이기도 하다. 모바일오피스, 홈오피스가 보편화된 요즘에는 집 안에 업무를 위한 공간을 따로 두거나 집 안에서 업무를 처리하는 것이 어색하지 않지만, 사실 이런 경향은 지극히 최근의 일이다.
유럽에 처음 서재가 등장한 것은 15세기 무렵이었다. 부유한 귀족들이 침실과 가까운 곳에 방을 따로 만들어 화려하게 장식하기도 하고 귀중품을 보관하면서 별실이라는 공간이 생겨났다. 침실보다도 더 내밀한 공간으로 만들어진 별실은 주로 기도를 하거나 독서, 명상을 즐기는 공간으로 활용됐다. 지극히도 사적인 용도로 쓰이던 별실은 곧 남에게 보여줄 필요가 없는 취향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고 진귀한 예술품이나 보석, 악기나 서적 등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별실이 처음 생겨나던 15세기에 73권으로 만들어진 성경 1질을 사기 위해서는 집 10채 값의 가격을 지불해야 했다. 개인이 다양한 서적을 소유한다는 것은 당연히도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중세의 막바지에 이르러, 구텐베르크의 인쇄술로 도서가 대량으로 보급되면서 개인이 서적을 손쉽게 소장할 수 있게 되었다. 집 안에 전용 별실을 만들 수 있을 정도의 경제력을 가진 이들은 때마침 불어닥친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영향으로 지식과 학문을 탐닉하면서 다량의 서적을 수집했다. 가격이 내려갔지만, 여전히 귀했던 책들은 별실로 옮겨져 보관됐다.
어떤 이들은 은밀하게 장부를 작성하거나 돈을 계산하기 위해, 또 어떤 이들은 사적인 편지나 일기를 쓰기 위해 이 별실을 애용했다. 들키고 싶지 않은 비밀스러운 취미를 즐기거나 내밀한 시간을 보내기에도 별실은 완벽한 장소였다. 이 매력적인 공간은 점차 화려하고 멋지게 꾸며지기 시작했다. 화려한 그림과 장식품으로 채워지기도 했고 다양한 종류의 양서가 벽을 채우기도 했다. 주인의 취향에 따라 점차 별실은 현대적 의미의 서재가 되거나 갤러리, 혹은 창고로 변하기도 했다.
현대적인 의미의 서재가 탄생한 것은 어쩌면 구텐베르크에게 가장 큰 공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중세가 끝나가고 근세에 접어들 무렵, 도서의 대량보급으로 그 어느 때보다 지식인 계급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 새로운 유형의 사람들은 작고 조용한 방에서 혼자 보내는 시간을 좋아했다. 유례없이 고독과 사색을 즐기는 인간이 탄생한 것이다. 그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작고 내밀하며 충분히 사적인 공간이었다.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공간, 사색과 사유의 공간으로서의 서재가 비로소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주인의 지성을 상징하는 공간으로서 서재는 전통적으로는 서적, 현대적으로는 컴퓨터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또 장부를 정리하거나 글을 쓰는 행위, 컴퓨터 앞에 앉아 하는 행위 등이 모두 업무, 일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서재는 집안에 들어선 사무실이기도 하다. 가장 내밀한 공간인 동시에 업무를 처리하는 공적 행위가 이루어지는 장소라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때로는 사회와 가정 모두에서 분리된 완벽한 도피처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집에서 업무를 보며 지루한 시간을 보내는 독특한 공간이 바로 서재다.
골치 아픈 여러 문제에서 벗어나 혼자만의 내밀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장소, 일상생활과 분리된 공간으로서의 서재는 요즘 들어 그 역할이 크게 축소됐다. 홈오피스의 보편화로 서재의 역할이 확연히 줄어든 것이다. 책장과 책상이 있던 독립된 방은 아예 집 안에서 사라져버리거나 혹은 일상과 업무가 혼재된 기이한 공간으로 변했다. 책장과 책상은 점차 노트북과 와이파이로 대체됐다. 단, 고독과 사색은 대체되지 않은 대신 거의 사라져버렸다.
공간이 귀한 소형 아파트나 원룸에선 책상 대신 다용도 테이블을 놓고 식탁, 책상, 작업 테이블 등 다양한 용도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다. 책장 대신 장식장이나 선반을 두기도 하며 책장을 장식장으로 쓰기도 한다. 책의 역할과 가치가 축소된 만큼, 서재도 축소되거나 사라져 서재의 기능이 집 전체로 흡수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집 전체가 일하는 공간으로 변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리고 집에서 책을 보는 사람보다 집에서 일하는 사람이 많아졌다는 말이기도 하다.
홈오피스의 대중화는 집을 휴식하는 곳이 아닌 일하는 곳으로 만들었다. 거실 한편에 테이블과 노트북을 놓고 일하는 이들도 있고 침실이나 작은 공간에 파티션이나 커튼으로 공간을 분리해 사용하는 이들도 있다. 집 안에 작업 공간을 만드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일상과 아주 가까운 곳에 일의 무게를 함께 둔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활과 휴식, 업무와 여가의 사이에 일이라는 무거운 짐을 들이려 한다면 신중해야 한다. 집에서 일하는 사람이 늘어난다는 말은 여가시간을 일로 보내는 사람이 늘어난다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공부방과 침대방을 따로 줄 수 있는 여유가 있다면 따로 주는 것이 좋다. 책장과 책상이 있는 공부방은 아이가 스스로 공부와 휴식 사이에서 적당한 균형을 잡을 수 있게 도와줄 것이다. 균형을 잡을 줄 모른다는 것은 위태로운 일이다. 어른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노동과 휴식 사이의 균형은 사적 공간과 공적공간, 서재와 집 전체 그리고 업무와 여가 사이의 균형과도 같다. 포근하고 안락해야 할 집을 일만 하는 공간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는 서재라는 균형이 필요하다.
기사 노일영
차주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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