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리적인 똑쟁이들은 가격 대비 성능의 비율을 모든 잣대로 삼는다. 5년 전 신조어에 등극한 ‘가성비’의 역사는 생각보다 오래됐다. 1500~1600년대 주옥같은 작품을 남긴 영국의 시인 조지 허버트(George Herbert)는 자신의 작품에서 ‘Not worth the candle’이라는 문장을 사용했다. ‘돈 들일 가치가 없는’, ‘가성비가 나쁨’을 뜻하는 문장에서 그는 왜 캔들(Candle, 양초)을 인용했을까? 빛이 귀해 초를 켜던 시절, 돈을 몽땅 잃은 도박꾼의 처지를 ‘양초보다 못한 놈’에 빗댄대서 유래한 것으로 전해진다.
초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기원전 30세기 고대 이집트에서 쇠기름(牛脂)에 적신 갈대를 심지로 사용한 흔적이다. 기원전 2세기 중국 진나라 기록 사기인 <진시황본기>에서는 진시황릉을 조성하면서 ‘인어의 기름’으로 초를 만들어 꺼지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학자들은 이를 고래기름이나 바다 포유류의 기름을 원료로 한 것으로 추측한다. 밀랍 양초 중 가장 오래된 유물로는 독일 알프스의 오버플라흐트(Oberflacht)에서 발견된 기원후 6~7세기의 테이퍼 양초 유물이다.
티라이트(Tea Light)는 찻주전자를 덥히는 용도로 쓰이던 초다. 금속 케이스 안에 초를 두어 촛농이 흐르지 않고 끝까지 태울 수 있다. ‘가래떡 초’로 불리는 테이퍼(Taper)는 심지를 촛농에 담갔다 뺐다 반복하기 때문에 가늘고 긴 모양이 특징이다. 초가 작고 가격이 싸서 이벤트용으로도 자주 쓰인다. 티라이트 3개를 쌓아놓은 제례용 보티브(Votive), 병 안 가득 촛농을 넣어 파는 향초, 액체초, 젤 캔들 등 초의 종류는 형태에 따라 무궁무진하다.
촛대는 밀랍이 일찍부터 발달한 이집트와 그리스에서 발명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로마시대에도 그 숫자는 적었으나 촛대가 있었을 것으로 예측된다. 황제 티투스의 개선문에 부조된 7개의 촛대, 폼페이의 유물 등에서 당시의 촛대 모양을 살펴볼 수 있다. 중국에는 BC 3세기에 초가 있었고, 전국시대 말기 촛대가 분묘에서 출토되었다. 한국에서는 낙랑(樂浪)시대로 예측되는 역사적 유물이 고분에서 출토되었는데, 청동으로 만들었으며 잔대 중앙에 초를 꽂는 못이 있다.
종교적 의식과 영적인 수단으로서의 촛불은 상징적이면서 기능적이다. 유대인 가정에서는 매주 금요일 해 질 녘이면 안식일의 시작을 알리기 위해 두 개의 촛불을 켠다. 메노라(Menorah)로 알려진 일곱 갈래 칸델라브라(Candelabra)는 나뭇가지 모양의 촛대를 의미한다. 고대 예루살렘 성전의 칸델라브라를 바탕으로 한 이스라엘 국가의 상징이다. TV나 라디오 통신을 위해 하나의 철탑에 안테나를 수평으로 줄지어 설치하는 방식을 뜻하기도 한다.
항의나 추모를 목적으로 하는 비폭력 평화시위인 촛불시위는 한국에서 ‘촛불문화제’라는 특별한 형태로 발전했다. 야간시위를 금지하는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의 제약을 넘어서기 위해 고안된 새로운 집회의 방식이다. 2000년대 이후 촛불집회는 집단 시위나 저항 행동의 방식으로 자리 잡았지만, 참여 시민들이 함께 어울리고 즐기는 문화의 일종으로 자발적인 시민참여의 수준을 높여가고 있다.
“Better to light a candle than to curse the darkness.”
- Eleanor Roosevel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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