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한글은 너무나도 익숙하고 당연한 존재다. 현대의 한글은 단순한 문자를 뛰어넘어 문화 전반 및 생활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다. 1443년, 글자를 몰라 소통하지 못하는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 배우기 쉬운 스물여덟 개의 문자를 만든 세종대왕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어도 제 뜻을 펼 수 없는’ 백성들을 위해 누구나 쉽게 배워서 편히 쓸 수 있도록 한글을 창제했다. 글자는 그 창제 목적에 맞게 모양이 매우 단순하고 수가 적었다. ‘슬기로운 사람은 하루아침 만에 깨우치고,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열흘이면 배울 수 있는’ 한글은 한 나라의 왕이 백성을 위하고 아끼는 마음으로 탄생한 배려와 소통의 문자이다. 만약 그 당시 한글이 탄생하지 못했다면 지금의 기사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한글은 창제 후 지금까지 한국 문화의 바탕을 이루었고, 삶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다양한 변화를 거듭해왔다. 세종대왕의 철학과 예술성이 반영된 문자는 조형적으로도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며 오늘날 많은 예술가에게 창작의 영감을 주고 있다. 한글이 담고 있는 언어적인 내용을 넘어 한글 자체가 지닌 미적·조형적 가치에 집중한 디자인적 작업은 점점 활발해지고 있다.《ㄱ의 순간》은 한글의 잉태와 탄생, 일상과 미래를 예술로 조명하는 현대미술 거장들의 작품과 보물급 역사유물을 대규모로 함께 선보이는 전시다. 그동안 한글을 주제로 한 전시들이 한글의 형태와 의미에 초점을 두거나 서예가와 타이포그래피 작가들의 전유물이었다면, 이번 전시에서는 이러한 관습적 맥락에서 탈피해 문자로서의 한글이 예술과 결합하는 지점을 보여주고자 했다. 한글이 탄생하는 순간부터 일상과 미래의 모습까지, 장르를 초월한 예술의 총재를 만나보자.
ㄱ, ㄴ, ㅁ, ㅅ, ㅇ 다섯 섹션으로 나뉜 전시 공간은 한글 창제와 관련된 핵심 발음기관 아(牙), 설(舌), 순(脣), 치(齒), 후(喉)를 상형화한 것으로 목(木), 화(火), 토(土), 금(金), 수(水)와 춘하추동, 음양오행의 원리로 순환배치 했다. 첫 번째 <ㄱ - 씨> 섹션에서는 한글의 잉태와 탄생 지점에서 소리와 문양의 관계를 통찰하는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 어둠 속 6,000개의 붉은색 LED 전구가 연속으로 깜빡이는 동시에 심장박동 소리와 같은 전자음이 쿵쿵쿵 울리며 공간을 지배한다. 글자들은 ‘쿵’, ‘킹’, ‘콩’ 등으로 변화하고 이에 맞춰 소리도 달라진다. 2인조 미디어아트 작가 태싯그룹이 선보이는 길고 짧은 두 음으로만 뜻을 전달하는 모스 부호에 흥미를 느꼈고, 이를 한글에 대입하여 탄생한 작품이다.
<ㄴ - 몸> 섹션에서는 자음과 모음의 결합구조, 즉 건축성을 다룬다. 한글의 ‘초성+중성+종성’이 네모꼴로 시각화되는 구조 원리를 이야기한다. 낱개의 소리 언어가 모여 하나의 몸체가 되듯, 산스크리트어 불경 독송이 한글 자막으로 변화하는 서도호 작가의 영상, 이슬기, 박대성, 박이소 작가 등의 작품에서 한글이 자음과 모음으로 건축되고 구조화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방탄소년단과 그들의 팬 ‘아미’를 주제로 추상에서 점차 유기적 형태로 나아가며 한글의 확장성을 드러낸 강이연 작가의 <문(GATES)>은 공간 전체를 가득 메우며 거대한 몰입감을 선사한다. 5분 분량의 영상은 점에서부터 시작해 선이 면을 이루고, 어둠 속에서 문이 열리며 빛이 들어와 섞이고 퍼지는 서사의 구조를 지니고 있다. 작가는 한글이 읽히려고 존재하듯 이 작품 역시 그 의미가 잘 읽히고 해석될 수 있게끔 신경 썼다. 해석의 즐거움을 주는 여러 상징을 작품에 심어놨기에 숨어있는 상징을 발견하는 것도 또 다른 즐거움이 될 것이다.
<ㅁ - 삶> 섹션은 한글이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보여준다. 삶의 희로애락을 표출하는 한글은 문양, 한자, 알파벳은 물론 몸 언어와도 어우러지며 예술 언어로서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시서화(詩書畵)의 전통에서부터 현대 미술 언어로 진화해 오늘날 삶의 빛과 어둠을 드러내는 한글의 속성을 만나볼 수 있다. 통영 누비이불로 한국 속담을 표현한 이슬기 작가의 작품은 얼핏 보면 추상화처럼 느껴지지만 제목을 알고 나면 금방 형상을 발견하게 된다. 벽에 걸린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른다>는 속담의 뜻처럼 무지함을 드러내기 위해 흑백만을 사용했고, 바닥에 눕힌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와 <서당 개 삼 년에 풍월을 읊는다>에서는 각각 짙은 갈색의 개와 연보라색 귀를 늘어뜨린 한 마리 개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진다.
한가람미술관 제7전시실로 이동하면 마지막 <ㅇ - 꿈> 섹션을 만나게 된다. 우리말과 글, 소리와 그림의 원형은 하늘, 땅, 사람이다. 암각화, 고대 토기, 청동 거울 등의 유물에 새겨진 문양을 재해석한 현대 작가들의 작품을 통해 예술의 미래를 바라보고자 했다. 작가의 작품들은 실제 유물과 함께 한데 어우러져 전시되어 있다. 신문 용지를 볼펜과 연필로 까맣게 칠해 활자를 지워버린 최병소 작가의 작품은 문자와 이미지를 없애 문명 이전으로 돌아가려는 태도를 담고 있다. 이 외에도 ‘공무도하가’를 한글 작업으로 풀어낸 안상수 작가, 언어의 원점을 노래하는 이강소 작가, 돌(자연)과 쇠(인공)의 나열을 통해 자연과 문명의 대화를 유도하는 이우환 작가, 석기시대 아프리카 목재 위에 부적처럼 네온사인 한글을 올려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는 최병화 작가 등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한글은 창제 이래 언어 수단으로만 간주되어 왔다. 하지만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동기와 과정을 생각해보면 자연과 우주 질서의 모방, 인간 중심의 민주정신, 실용정신 등 현대 미술과 공명하는 예술적 특징이 분명히 드러난다. 문자 이전의 시기부터 한글 창제 그리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작고한 거장의 작품과 현재 한국 미술계를 대표하는 작가의 회화, 영상, 설치, 서예 등 전 분야를 막론하는 작품들을 살펴볼 수 있던 이번 전시를 통해 언어는 예술의 본령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너무 익숙해서 잠시 잊었을지도 모를, 예술가들의 손끝에서 다시 태어난 문자를 통해 한글의 아름다움을 되새겨보자.
이지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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