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벼락에, 칠판, 바닥, 공책에 낙서 한 번 하지 않으며 자란 사람이 있을까? 우리는 모두 조금씩은 아티스트였을지도 모르겠다. 고작 낙서가 무슨 예술씩이나 되느냐고 묻고 싶을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 낙서는 예술의 영역 안에 있어왔다. 바로 ‘그래피티’에 대한 이야기다. 그래피티(Graffiti)는 그 역사의 시작과 함께 늘 논란의 대상이었다. 공공장소, 벽에 그림과 글자를 그려 넣는 행위. 그래피티가 타인의 재산을 훼손하는 행위와 직결되기 때문에 이를 그저 범죄에 불과하다고 보는 입장과 많은 이들에게 그 예술성을 인정 받고 있는 반달리즘과 반항 정신을 중심으로 하는 예술의 하나라는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그래피티가 꼭 반달리즘과 반항 정신을 기치로 삼을 필요는 없다. 그래피티는 이미 하나의 ‘표현 기법’ 중 하나로서 우리의 삶 속에 자리 잡아가고 있으니까. 뮤지엄 그라운드에서 준비한 기획전 《MY SPACE》에서 만날 수 있는 그래피티들처럼 말이다. 뮤지엄 그라운드는 Artime Joe, XEVA, Semitr, Kenji Chai 등 개성 넘치는 그래피티 작가들을 초대했고, 그 결과 뮤지엄 그라운드의 공간들은 그래피티가 발산하는 운동감과 에너지를 통해 전시공간을 넘어 ‘예술의 현장'으로 탈바꿈할 수 있었다. 현대의 그래피티는 그 주제와 내용에 있어 점차 다양해지면서도 취향과 정서는 계속해 공유되고 있었다. 이렇게 모인 동시대 네 명의 작가가 꾸며낸 MY SPACE. 전시 공간의 벽면 전체를 채우는 뮤럴, 다양한 오브제, 캐릭터와 레터 스타일을 통해 이전의 미술관에서 만날 수 없었던 예술의 현장감을 그대로 느껴보는 건 어떨까.

 

 

 

ARTIME JOE

 

Artime Joe는 1993년 독일을 중심으로 결성, 현재 10개국 27명이 소속된 크루 스틱업 키즈에서 10년 째 활동 중인 아티스트다. 그의 작업 공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역시 캐퍼스일 것이다. 캐퍼스는 커다란 모자를 의인화한 캐릭터다. 때로는 스프레이 페인트와 룰러를 들고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이 캐릭터가 작가의 페르소나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알아챌 수 있는 대목이다.

 

캐퍼스는 그의 작품과 작품을 잇는 역할을 한다. Artime Joe의 작업에 등장하는 캐릭터는 이미 여러 영화와 애니메이션, 게임을 통해 익숙하다. 세일러문, 소닉, 도라에몽, 슈퍼마리오, 아톰, 드래곤볼까지. 이 캐릭터들의 머리 위에 씌워진 캐퍼스들은 작가와 관람객들을 대신해 여러 캐릭터 사이를 뛰어 다니며 전시를 채워나가고 있다.

 

 

 

 

Kenji Chai 


Kenji Chai는 싱가포르를 중심으로, 여러 작가들이 함께 만든 짓나잇(Zincnite) 크루에서 활동 중인 말레이시아 작가다. 그는 아티스트가 되기 전에 그래픽 디자이너였다. 그에게 그래픽 디자인이란 그저 ‘숫자로 된 파일’이었고 실제의 작품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초등학교 때부터 미술 경연 대회에 참가했던 그가 마침내 발견한 건 ‘그래피티’라는 작업의 창조성이었다. 그래픽 디자인과 그래피티의 차이는 적지 않다. 벽에는 실행 취소 버튼도 없고, 새 파일 기능도 없다. 반대로 그 어려움은 작가에게 더 큰 자부심을 가져다주었다.

 

Kenji Chai는 ‘떠돌이 강아지, 차이고(Chaigo)’라는 캐릭터를 중심으로 자신의 공간을 풀어 나갔다. 길을 잃은 떠돌이 강아지. 차이고에게는 자신만의 공간이 없다. Kenji Chai에게 차이고는 자신 그 자체다. 길을 잃고 방황하던 어린 나날들, 세상 어디에도 기댈 곳이 없던 좌절감을 우연히 마주친 유기견에게서 떠올렸다. Kenji Chai는 과거의 힘듦에 멈추지 않기 위해 차이고를 통해 세상과 대면한다.

 

 

  

 

XEVA


XEVA는 한국에 그래피티가 잘 알려지지 않았던 때인 1999년부터 계속해 그림을 그려온 아티스트다. 그래피티와 회화, 스프레이와 유화라는 경계를 자유롭게 오가는 그는 탄탄한 드로잉을 기반으로 자신만의 시그니쳐 스타일을 선보인다. 첫 시작은 단지 호기심이었다. 호기심이 즐거움으로 바뀌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모든 벽이 그에게는 활력소였다. 고등학교 시절 배운 서양화 기법, 대학에서 경험한 그래픽 디자인, 일러스트레이션을 바탕으로 그는 매우 독특한 시도를 이어가고 있다. XEVA는 Space를 공간을 넘어 ‘우주’의 차원으로 확장시켰다. 일상을 둘러싼 세계, 즉 감각적 공간이라는 한계를 벗어나려는 작가의 발상. 추상과 반추상의 독창적 이미지가 연속되며 경험해 볼 수 없는 미지의 세계 앞에 관람객을 데려다 놓는다. 그가 사실적 얼굴이 각각의 내면적 정서와 마주하도록 했던 ‘인물 시리즈’는 작가 자신의 내면을 추상적으로 분열시킨 작품을 통해 확장되었다.

 

 

 

 

Semitr 


Semitr는 그래피티 작업에서 자유로운 플로우를 만들어내고자 했다. 그는 단순한 그래피티를 관람객들에게 보여주기보다, 그래피티 아티스트로서 시도할 수 있는 다양한 것에 주목했다. 작업실에 놓인 골판지, 종이박스, 아크릴, 스티로폼과 같은 버려진 물건이 그래피티를 위한 ‘재료’로 활용되었다. 오브제를 쌓아 만든 형태 위에 새긴 글자는 입체적 공간의 흐름을 만들었다. 이번 전시에 초점을 둔 것은 표면적인 이미지보다는 글자 자체의 물리적 변형이었다.

 

 

 

《MY SPACE》 展을 보고 나서는 순간 관객들은 자신들이 미술관에서 그럴 듯하게 정돈된 ‘예술 이후’를 관람한 것이 아니라, 작가들이 정성스럽게 그려 놓은 예술, 그 안에 깊숙이 들어갔었음을 깨닫게 된다. 단지 이미 그림을 그려 놓은 캔버스가 벽면에 걸리는 것이 아니라, 벽면 자체가 거대한 캔버스가 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예술은 생각보다 먼 곳에 있지 않다. 관람을 마치고 집에 들어갈 때, 자그마한 스케치북과 크레파스라도 한 번 사 보는 게 어떨까. 자신의 내면을 담은 캐릭터를 하나 둘 씩 그려내는 순간, 우리 역시 아티스트가 되어가고 있는 스스로를 만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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