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3분의 1은 잠이다. 인류 역사의 3분의 1도 우리가 자는 동안에 지나갔다. 그래서 역사의 3분의 1은 기록되지 않은 시간이며 기록되지 않은 역사이기도 하다. 이 기록되지 않은 역사가 이루어진 곳은 주로 침실이었고, 우리가 그만큼의 시간을 보내는 곳도 침실이다. 침실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고 당연한 일이다. 우리 삶의 커다란 일부를 이야기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편으론 낯설고 심지어 수줍기도 하다. 침실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사적이고 내밀하며 신성하기 때문이다.







매일 따뜻한 잠자리와 먹거리에 대해 고민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 시기에 잠자리는 외부의 위험과 추위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공간 즉 현대적 의미의 집 그 자체였다. 잠자리가 있는 곳이 집이었고 집이 잠자리였다. 이 시기에 인류는 출생에서 임종까지 인생의 모든 시간을 하나의 공간에서 보냈다. 잠을 자고 음식을 먹는 기본적인 생활부터 아이를 낳거나 임종을 맞이하는 일생일대의 모든 사건이 한 장소에서 일어났다. 공간이 목적과 기능에 따라 분리되기 전까지 침실과 거실과 부엌은 모두 하나였기 때문이다. 잠자리에서 모든 사건이 벌어졌으며, 모든 문제가 일어났고 또 해결됐다.







침실이라는 이름과 그 개념은 사생활이라는 말과 떨어질 수 없는 관계다. 중세시대까지 사생활이라는 개념은 존중받지 못 했다. 집안의 거의 모든 식솔들은 커다란 주택의 한가운데 넓은 공간에 모여서 함께 잤다. 불을 피워두곤 했기 때문에 연기와 냄새가 가득하고 불편했겠지만, 적어도 온기와 안전을 위해서는 함께 모여서 자는 것이 바람직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개인의 사생활보다는 공동체가 더 중요했고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15세기 즈음 오늘날 침대라고 부를만한 것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전까지 귀족이 아닌 이들은 보통 맨바닥에서 잤다. 이때의 침대는 많은 이들이 함께 사용해야 했기 때문에 지금보다 훨씬 컸다. 침대가 만들어지자 침대에서의 규칙과 예절이 생겨났다. 많은 이들이 함께 모여서 잠을 잤기 때문에 사적이라기보다는 공용의 성격이 짙었다. 침대에 눕는 순서가 관습적으로 정해졌고 침대를 관리하는 일이 중요한 일과의 하나가 되었다. 물론 불편했겠지만 적어도 바닥에서 자는 것보다는 훨씬 푹신했을 것이다. 







대부분의 이들이 맨바닥에서 함께 모여 잠을 잤지만, 귀족들은 진작부터 따로 잠을 잘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지금 보기에는 다소 조잡한 침대를 만들고 침대 주변에 네 개의 기둥을 만들어 커튼을 두르곤 했다. 당시의 침대라고 해봐야 건초나 짚을 채워 넣은 자루일 뿐이었지만 온기를 지키기에는 바닥보다 훨씬 좋았다. 침대 주변에 두른 커튼은 사생활을 보호하는 역할도 했겠지만, 오히려 외부의 찬 공기를 막기에 더 좋았다. 어쨌든 덕분에 조잡하나마 부유한 부부는 둘만의 공간을 만들 수 있었고 둘만의 사생활을 가질 수 있었다. 은밀한 공간은 딱 침대 만했다.





당시에 귀족들이 침대를 놓던 곳을 침실이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오히려 집무실, 서재, 거실, 침실의 기능을 합친 다목적 공간이라 부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귀족들이 신분이 낮은 다른 이들과 자신들을 구분하기 위해 사용한 방법은 방을 따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2층 저택의 2층을 통째로 쓰는 것이었다. 여전히 집 전체가 방 하나로 여겨졌고 침실이 아닌 침대만 있을 뿐이었다. 사생활이라는 개념 자체가 희박했던 시기였던 만큼 귀족들조차 ‘남몰래’ 어떤 일을 한다는 것은 어려웠다. 모든 생활은 공개적이었고 사회적이었다.







17세기에도 여전히 침대는 모두의 것이었고 침실은 특별한 공간이 아니었다. 그러다 17세기의 막바지에 복도가 등장하면서 모든 방과 방이 나뉘고 독립적인 공간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각각의 방을 특별한 기능으로 나누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잠을 자는 공간인 침실이 생겨났지만, 여전히 사회적 성격이 남아있었다. 친구들과의 모임이나 각종 업무를 보는 등의 기능은 아직 분리되지 않은 채 침실에 남아있었다. 카드놀이와 다도를 즐기는 곳도 침실이었다. 침실이 오로지 취침만을 위한 곳이 된 것은 한참 후에 일어난 일이다. 





18세기, 프랑스 루이 15세의 정부였던 퐁파두르 부인은 베르사유 궁전을 개조해 곳곳에 작은 방을 만들었다. 인테리어에 관심이 많았던 그녀는 이렇게 만들어진 방들을 섬세하게 장식했다. 충분히 여성스러운 분위기, 조개 무늬와 소용돌이 무늬, 이국적인 벽지 등으로 화려하게 꾸며진 이 방은 사용하는 이의 품위를 지키고 사생활을 보장할 수 있는 사적인 공간으로 만들어졌다. 비로소 현대적 의미의 침실이 탄생한 것이다. 이때 만들어진 방들과 그 장식들은 훗날 ‘로코코’라 불리는 양식의 전형이 되기도 했다.

퐁파두르 부인이 만들어낸 침실은 사실 취침보다는 다른 목적을 주로 갖고 있었다. 때문에 지극히 여성적이고 아주 내밀한 공간이었다. 이 특색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여성의 사적이고 은밀한 영역으로 발전한 침실이 가정에서 가장 특별하고 고급스러우며 섬세한 공간이 된 것이다. 최신형 TV와 값비싼 오디오, 커다란 소파와 거대한 장식품 등으로 과시적인 남성성을 드러내는 거실과 비교되는 부분이다. 침대 주변의 가족사진과 추억이 담긴 물건들은 이 공간의 사적 내밀함과 신성함을 잘 보여준다. 프로이트는 침실을 부인, 아내와 특히 연관 지어 이해하곤 했다.





19세기는 고전적 보수주의와 도덕주의, 화려한 양식과 산업 발전의 시기였다. 건축과 가구는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하고 정교해졌다. 이 시기에 드디어 침실이 오직 취침만을 위한 공간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당시 남성과 여성을 엄격히 분리하던 사회적 분위기 탓에, 남자와 여자가 같은 침실을 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일로 여겨졌다. 남자 하인과 여자 하인의 잠자리가 따로 만들어졌고 마찬가지로 상류층의 남편과 아내가 한 침대를 쓰는 것, 나아가 한 침실을 쓰는 것조차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게 됐다. 덕분에 20세기 초까지도 중류층 부부들은 한 침실에 두 개의 1인용 침대를 놓곤 했다. 







20세기 초 할리우드 영화에 침실이 등장하기 전까지 침실은 지극히 사적인 공간이었다. 침실에 대해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부끄러운 어떤 것이었다. 그러나 영화를 통해 침실은 욕망의 상징으로 대두했다.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의 방식으로 표현한다면, 당시의 영화들은 무엇을 욕망해야 하는지와 어떻게 욕망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었다. 할리우드 영화 속 침실은 부드러운 실크 잠옷과 호사로운 새틴 재질의 나이트가운을 걸친 스타들의 공간, 화려한 소품과 고급스러운 가구가 놓인 환상적인 공간이었다. 영화를 본 여성들은 영화나 영화배우보다 그들의 침실에 더 주목했다.

사실 침실이라는 개념이 생기고 침실에 중요한 위상이 생긴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침실이 본격적으로 다른 공간들과 분리되어 사적인 공간으로 취급된 것이 불과 19세기의 일이다. 이전까지 수면을 목적으로 한 특별한 공간은 필요하지 않았거나 없었다. 모든 공간은 공동체적이고 사회적이었다. 그러다 거주 공간에서 벌어지는 쉬는 일, 먹는 일, 책을 읽거나, 게임을 하거나 혹은 파티를 즐기고 잠을 자는 등의 모든 일들을 위한 각각의 독립적인 방이 생겨났다. 침실도 마찬가지였다. 침대가 있는 독립적인 방이라는 개념의 침실은 실은 굉장히 근대적인 개념인 것이다.

현대에 이르러 침실에서 아이를 낳거나 임종을 맞이하는 일은 더이상 익숙한 일이 아니다. 이제 그런 중요한 사건들은 침실을 벗어나 병원에서 일어나는 일이 되었다. 그럼에도 침실의 역할이나 중요성은 조금도 떨어지지 않았다. 여전히 우리가 침실에서 잉태되는 까닭이다. 집 자체였던 침실이 집의 일부로 축소되면서 만들어진 집이라는 완충지대가 덕분에 침실은 더욱 사적이고 내밀한 공간이 됐다. 침실은 집 안의 집, 내부의 작은 우주가 되었다. 이 작은 우주가 수면과 또 부부만의 시간과도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침실은 진정 행복한 곳, 가장 자유롭고 편안하게 꿈꿀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




기사 노일영

저작권자 ⓒ Deco Journal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