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bjet -집안으로 내려온 하늘 ‘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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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노일영 집안으로 내려온 하늘 ‘천장’ - 창조와 집중의 비밀 천장은 공간을 나누는 벽들을 모아 하나의 공간으로 마무리 짓는 건축의 마지막 요소다. 기능적으로는 직사광선, 비, 바람과 같은 하늘로부터의 위험을 방어하는 역할을 하며 공간을 쾌적하고 안정적으로 만들어 준다. 그런데 당장 집과 사무실의 천장이 어떻게 생겼는지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사람들은 천장을 쉽게 간과하고는 한다. 어떻게 생겼는지, 어떤 질감인지 또 어떤 높이로 만들어져 있는지 잘 신경 쓰지 않기에 당연히도 잘 모르기 마련이다. 하지만 천장은 약간의 차이만으로 공간의 분위기를 크게 바꾼다. 다양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것은 물론 삶의 질에도 많은 영향을 끼친다. 하늘로부터의 위협을 방어하는 건축 요소로서, 공간을 안전하고 아늑하게 만든 천장은 그러나 하늘의 다른 요소까지도 막아버렸다. 바로 푸른 하늘과 따듯한 햇빛, 달빛과 별빛이다. 땅과 작물, 공기만큼이나 중요한 하늘을 막아버린 천장을 사람들은 불안하게 여겼다. 공간의 안정성과는 별개로 자연이나 신(神)과의 유리감을 느끼게 했기 때문이다. 천장에 어떤 상징적 요소도 남지 않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천장으로 유발된 이 심리적 불안함을 극복하기 위해 고대로부터 사람들은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가장 손쉬운 방식은 천장을 하늘과 닮게 만드는 것이었다. 천장에 하늘과 비슷한 색을 칠하거나 그림을 그리는 행위부터 하늘과 닮은 둥근 모양의 천장을 만들거나 천장에 구멍을 내는 방식까지 그 표현 방법의 다양함과 관계없이 목적은 오직 천장을 하늘과 최대한 닮아보이게 만드는 것이었다. 진짜 하늘은 아니지만 진짜에 버금가는 하늘을 집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천장으로 하늘을 만드는 이런 행위는 방에 야광 별을 달아놓거나 태양을 닮은 샹들리에를 설치하는 요즘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천장을 뜻하는 영어 씰링(Ceiling)은 하늘을 뜻하는 프랑스어 씨엘(Ciel)에서 유해했다. 처음부터 하늘과 동일시 여겼던 고대의 전통에서 출발한 셈이다. 작가 수에토니우스는 ‘12황제 전기(The Lives of the Twelve Caesars)’에서 로마 네로 황제 시대 건축물의 천장을 천체의 운동을 모방한 둥근 천장이라 표현했다. 그 천장은 푸른색으로 칠해져있었고, 별 모양의 장식을 만들어 넣었으며 심지어 천제가 움직이는 방식으로 천천히 회전운동까지 했다고 한다. 또 중세 성당의 돔 천장은 푸른색으로 칠해져있었고 금빛 별과 태양으로 장식되어 있었으며, 르네상스 시대의 대저택에는 구름과 천사들이 그려진 천장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 요즘은 천장에 구름과 천사를 그려넣거나 푸른색으로 칠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그 전통의 흔적이 남아있는 부분이 있다. 바로 천장의 몰딩이다. 집이나 사무실 천장 둘레의 테두리에 둘러놓는 벽과 천장을 분리해주는 몰딩은 본디 천장에 칠해진 푸른색의 경계, 천장에 그려진 하늘 그림의 경계에 있던 복잡한 테두리의 흔적이다. 지금의 장식에 불과한 몰딩에서 천장과 벽을 분리해준다는 것 외에 어떤 의미를 더 찾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원래의 의미는 천장에 만들어진 하늘과 현실을 구분해주고 인간의 집과 집안으로 들여온 하늘을 한계짓는 상징적인 장식품이었던 것이다. 천장의 모양은 보통 다섯 가지 정도로 나눌 수 있다. 평평하고 곧게 뻗은 평지붕, 위쪽이 뾰족한 5각형 벽을 만드는 박공지붕, 박공지붕보다 양쪽 끝이 좁고 벽 위에 면구조가 하나 더 있는 모임지붕, 원뿔이나 원형으로 만드는 방형지붕, 한쪽으로 치우친 천장과 마름모형 벽이 특징인 외쪽지붕이 있다. 균일한 공간을 만드는 천장은 안정적이고 차분한 느낌을 주며 형태에 따라 공간을 구분해 주거나 비례감과 안정감을 주기도 한다. 면적이 좁은 공간을 넓고 탁 트인 공간으로 만드는 것도 천장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이러한 원리로 천장이 가진 높이 차이를 완만하게 조절해 사용자의 감각을 서서히 전환시키거나 극적으로 차이를 크게해 감각을 환기하는 장치로 쓰기도 한다. 중세에 세워진 교회나 성당은 대부분 크고 높은 돔 형태로 지어졌다. 이 크고 높은 돔 천장은 궁핍한 일상과 삶을 상징하는 어둡고 긴 복도와 함께 신자와 방문자들에게 격정적인 감동을 선사했다. 좁고 낮은 복도를 지나 거대한 공간감과 개방감을 가진 천장 아래의 홀에서 사람들이 경외감과 신성함을 느꼈던 것이다. 오늘날에는 잘 기획된 놀이공원이나 미술관에서 이런 장치를 흔하게 볼 수 있다. 2007년 미국 라이스 대학교(Rice University, Texas, U.S.A)에서 있었던 실험에 의하면 천장의 높이가 높아질 수록 공간 사용자의 창의력이 향상된다고 한다. 반대로 천장의 높이가 낮아지면 사용자의 집중력이 향상되는 효과가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연구결과도 있다. 이러한 연구결과를 사무실 환경 조성에 활용하는 기업들이 많다. 병원이나 상업공간에서는 공간의 목적과 사용자에 따라 전략적으로 공간을 구성한다.  구글의 본사인 구글 플렉스(Googleplex)는 직원들의 추상력과 창의력을 높이기 위해 천장을 높이 만든 것으로 유명하다. 지금 아이를 키우고 있다면 아이방을 어떻게 꾸며줄지, 어떤 아이로 키울지를 결정하기에 앞서 우선 천장의 높이를 확인해보자. 자세한 내용은 월간 아이엑스디자인 5월호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Objet - 화려한 성취의 갤러리 거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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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노일영   화려한 성취의 갤러리 거실 - 장식과 사교의 공간 오래전 집의 모든 공간이 하나의 커다란 방이었을 때에는 부엌과 침실, 거실과 구분이 따로 없었다. 그래서 거실에서 모든 일이 이루어졌다는 말은 부엌과 침실에서 모든 일이 이루어졌다는 말과 같은 말이다. 당시에는 거실에서 불을 피우고 음식을 만들었으며 따듯한 불 주변에 집안 식구들이 모두 모여 잠을 청했다. 집이 거실이었고 모든 일이 그곳에서 이루어졌다. 때로 손님이 찾아오면 손님을 맞이하는 곳도 역시 거실이었다. 손님 역시 거실에서 함께 밥을 먹었고 그곳에서 잠을 청해야 했다. 말 그대로 다용도 거실이었던 셈이다.   17세기 즈음, 집을 여러 개의 특화된 목적을 가진 공간으로 구획하고 나누려는 시도가 다양하게 이루어졌다. 다용도 거실에서 다양한 방(Room)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침실과 주방, 응접실 등 다양한 방이 다양한 목적을 위해 만들어졌고, 그 와중에 우리가 오늘 흔히 거실(Living Room)이라고 부르는 공간도 나타났다. 보통 응접실이라 불리었던 당시의 거실은 지금의 거실과는 다소 다른 의미와 목적을 갖고 있었다. 다만, 적어도 겉모양은 당시나 지금이나 크게 다르지 않다.   집이 여러 개의 방으로 나뉘면서 이전의 다용도 거실에서 여러 가지 공간과 기능들이 분리되었다. 침실과 부엌이 각자의 기능에 맞게 분리되어 나갔고 이어서 다양한 이름과 형태를 가진 손님을 맞이하는 공간이 만들어졌다. 당시의 응접실은 현대의 거실과 비슷하게 탁자와 의자가 있는, 손님과 차를 마시거나 대화를 할 수 있도록 꾸며진 공간이었다. 언제나 그랬듯, 사람들은 자신이 머무르는 곳보다 손님에게 보여줘야 하는 공간을 꾸미는 일에 더 많은 공을 들였다. 그래서 응접실은 다른 공간보다 특별히 더 장식되었고 신경 써 꾸며졌다.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만들어진 응접실은 일종의 전시장이었다. 집안과 가장의 내력과 실력, 전통과 성취를 집약해 장식하고 치장해야 했기 때문이다. 집안의 가보를 전시하거나, 빼어난 예술 작품을 걸어놓기도 했으며, 태피스트리와 같은 장식물로 공들여 치장했다. 그런 까닭으로 응접실은 점차 집안의 바깥주인을 상징하는, 무겁고 남성적인 공간으로 발전했다. 침실이 집안의 안주인을 상징하는 여성적인 공간으로 내밀하게 발전한 반면, 응접실은 그와는 대조적인 개방적이고 화려한 공간으로 발전한 것이다.   그래서 노동자들의 주택에는 응접실이나 담화실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그들에게는 손님을 맞이하거나 휴식을 즐길 공간이 필요 없었기 때문이다. 17세기에 시작된 응접실의 의미는 바로 그곳에서 드러난다. 온종일 노동에 전념해야 하는 이들에게는 쓸데없는, 장식과 사교를 위한 공간이 바로 당시의 거실 즉, 응접실의 의미였다. 응접실의 존재 자체가 집주인의 사회적 지위를 드러내는 공간이었으며, 기능적으로 존재하기보다는 상징적으로 존재하는 곳이었다. 응접실은 곧 집안과 가장의 권위와 권력 그 자체로 여겨졌다.   이후 도시가 발전하고 저택이 아닌 주택이나 아파트에 사는 평범한 사람들이 늘면서 응접실은 규모와 수가 크게 줄었다. 대부분의 도시 가정에는 하나 혹은 두 개의 응접실만 있을 뿐이었다. 사람들은 비교적 출입구에 가까워 손님을 맞이하기 편한 방 하나를 꾸미는 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값비싼 가구와 화려한 장식품들이 가득한 응접실 즉, 보다 현대적인 의미의 거실이 만들어진 것이다. 비록 그 규모와 수가 줄었지만, 손님을 맞이하기 위한 공간이었으므로 당연히 크고 화려하게 꾸며졌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에 이르러 새로운 디자인 스타일이 유행하면서 17세기에 시작된 화려한 응접실 문화와 양식이 순식간에 밀려났다. 모더니즘이 등장한 것이다. 20세기의 현대적 주택은 실용적이고 단순한 주거용 기계에 가깝게 여겨졌다. 장식과 치장은 최소로 줄었고 기능성이 강조되었다. 화려한 실내 장식의 자리를 대신 차지한 것은 놀랍게도 투명한 유리였다. 모더니즘은 풍부한 자연광을 거실로 끌어들였다. 여전히 아파트나 주택의 거실에서 찾아볼 수 있는 커다란 유리와 풍부한 자연광은 20세기 모더니즘의 상징인 것이다.   모더니즘의 등장만큼이나 거실을 크게 변화시킨 것은 TV의 등장이다.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꾸며지던 공간에서 TV를 보기 위한 공간으로 급격하게 그 의미가 변화한 것이다. 손님을 맞이하고 이야기를 나누거나 차를 마시던 공간에서 지금은 TV를 보기 위한 곳, TV를 보면서 쉬는 곳, TV를 보면서 밥을 먹거나 이야기를 나누는 곳이 되었다. 실제로 요즘 거의 대부분의 가정에서 거실에 놓이는 의자 즉 소파는 벽을 등지고 빈 벽을 바라보게 배치되곤 한다. TV의 등장이 바꿔놓은 생활 양식이다. 서로를 향해 놓였던 의자들은 이제 동시에 같은 곳을 본다.   예나 지금이나 거실에서 가장 중요한 가구는 의자다. 의자는 휴식을 취할 때나 편지를 쓸 때 반드시 필요했고 책을 읽거나 이야기를 나누는 등 실질적인 다양한 활동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해왔다. 요즘엔 거의 편하게 TV를 보기 위한 도구 정도로 취급받지만 말이다. 중세 유럽의 주택에서는 오직 집주인만 의자에 앉을 수 있었다. 지금처럼 푹신푹신한 소파가 아니었음에도 아무나 함부로 의자에 앉을 수 없었던 것은, 의자에서 하는 많은 행위들, 책을 읽는 일과 편지를 쓰는 일 그리고 휴식을 취하는 일들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18세기 들어 유행하기 시작한 푹신한 소파는 원래 아라비아에서 건너간 귀족적이고 호사스러운 사치품이었다. 17세기의 딱딱하고 불편한 의자와는 다르게 소파는 푹신푹신했고 다양한 자세로 편히 쉴 수 있었다. 당연하게도 응접실에 소파를 두는 것은 좋은 자랑거리였고 재력을 가진 이들은 앞다퉈 응접실에 소파를 놓았다. 더이상 거실이 전시장이 아니고 소파가 사치품이 아닌 이제는 대부분의 집에 소파가 놓여있으며 누구나 쉽게 소파에 앉을 수 있다. 심지어 남의 집 거실의 소파에서 잠을 자기도 한다. 거실의 겉모양은 예전과 비슷하지만, 의미가 달라진 덕분이다.   거실과 주방, 식당의 구분이 모호한 현대적 오픈 플랜식 주택은 1930년대에 등장하기 시작해 1950년대에 점차 일반 가정에 널리 적용되기 시작했다. 17세기에 나뉘기 시작한 다양한 방들이 다시 합쳐지는 데에는 아주 긴 시간과 다양한 기술의 발전이 필요했다. 모닥불이나 화로 대신 보일러와 라디에이터가 들어섰고 연기와 냄새를 만들어내던 주방에는 전자렌지와 환풍기가 생겼다. 딱딱한 나무의자 대신 안락한 소파가 들어섰으며, 어릿광대나 음유시인 대신 TV가 들어섰다. 거실의 다양한 변화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언젠가 지금의 양식과 문화도 바뀔지 모른다는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 아이엑스디자인 4월호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Objet - 생활에 표정을 만드는 창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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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노일영   생활에 표정을 만드는 창문 -마음이 통하는 통로 “널 향해 창을 내리, 바람 드는 창을” 산울림이 부르고 아이유가 다시 부른 노래 ‘너의 의미’에서 창문은 대화와 연결, 사랑과 관계의 의미로 등장한다. 노래 가사가 아닌 일상에서의 창문 또한 실로 그렇다. 창문은 소통과 관계의 상징이고 바람은 물론 빛과 의미, 심지어 마음이 통하는 통로이다. 뿐만 아니라 종종은 삶과 생활을 투영하는 액자가 되기도 하며, 건물과 거리에 리듬을 만들어주거나 생활에 표정을 더하기도 한다. 건축 요소, 인테리어 디자인 요소로서의 창문은 단순한 ‘구멍’ 그 이상이다.   잘 느껴지지 않지만, 창문은 건축의 기본적인 구성 요소다. 모든 건물에 창문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거의 모든 집에는 창문이 있다. 심지어 컨테이너 박스조차 ‘집’으로 사용하는 경우라면 창문을 만들어 넣는다. 적어도 창문이 있는 건물이라면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건물이라고 여겨도 될 것이다. 창문이 이렇게도 건축과 생활에 중요한 이유는 창문이 소통의 창구이기 때문이다. 실내와 실외의 사이에서 소통과 경계를 만들기 때문이다. 특이한 것은 소통과 경계의 창구이면서 사람이 드나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장 초라한 집에서조차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창문이다. 창문이 소통과 경계의 창구인 것은 몸이 문을 넘어 실내로 들어가기 전 혹은 몸이 문을 넘어 실외로 나가기 전에 이미 시선이 창문을 통해 실내로 혹은 실외로 넘어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어느 건물을 가더라도, 어느 건물에서 나가더라도, 몸보다 먼저 시선으로 경계를 넘어가곤 한다. 같은 이유로 가장 초라한 집에서도 가장 먼저 창문을 통해 실내를 살피게 된다. 창이 언제 어디서나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이유이기도 하다.   영어로 창문(Window)은 고대 스칸디나비아어 빈드(Vind, 바람)와 아우가(Auga, 눈)가 합쳐진 말이다. 풀이하자면, ‘바람 눈’이 될 것이다. 눈이라는 이름이 붙어있기 때문일까, 창문은 다양한 표정을 만들어 낸다. 친절해 보이는 표정이 있기도 하고 가끔은 새침데기 같아 보이는 표정이 있기도 하다. 다양한 표정의 건물이 모인 거리는 그래서 리듬감이 있고, 활기가 넘친다. 반면, 똑같은 표정을 지은 건물들은 그래서 지루하거나 가끔은 공포스럽기까지 하다.   처음부터 창문이 지금과 같은 역할을 한 것은 아니었다. 집에서 불을 피울 때 생기는 연기가 빠져나가도록 지붕에 작은 구멍을 뚫은 것이 인공적인 창문의 시작이었다. 아직도 흔하게 쓰이는 오큘러스(Oculus, 눈・둥근 창)가 창문의 첫 형태였던 셈이다. 처음 창문을 만들자, 매캐한 연기가 빠져나간 자리에는 신선한 공기가 들어왔고, 낮이면 따듯한 태양 빛이 들어왔다. 처음부터 창문은 실내와 실외의 바람과 빛이 소통하는 창구로 시작했다. ‘바람 눈’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 어쩌면 이런 까닭 때문일지 모르겠다.   초창기의 창문은 벽에 난 단순한 구멍이었고 기껏해야 가죽이나 나무로 덧대어 놓은 정도였을 것이다. 아직 유리를 세공하는 방법이 개발되지 않았고, 건물을 지탱하는 벽에 구멍을 뚫어야 한다는 기술적인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창문은 단순히 ‘구멍’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다 기원전 1세기 로마에서 핸드 블로잉(Hand Blowing) 기법으로 투명한 유리를 세공할 수 있는 방법이 개발되면서 지금과 비슷한 형태의 유리창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처음 만들어진 유리창은 유리병의 바닥을 잘라 벽에 끼워 넣는 형태였다.   17세기, 커다란 판유리를 만드는 기술이 개발되면서 창문에 새로운 역할이 더해졌다. 빛과 바람이 통하는 통로에 더해서 조망이라는 새로운 기능이 생긴 것이다. 창을 통해 실내에서 실외의 풍경을 바라볼 수 있게 되자 창문은 거의 액자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됐다. 창문을 통해 보이는 실외의 풍경을 실내의 장식적 요소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커다란 유리창을 통해 한강을 내려다볼 수 있다는 매력으로 한껏 몸값을 올린 서울 아파트의 가격을 생각한다면, 이 새로운 기능과 역할의 가치를 조금은 짐작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네덜란드 영국, 미국 등에서는 오르내리창(Double-hung Window, 내리닫이창)이 많이 쓰였고 나머지 유럽과 그 외의 지역에서는 여닫이창(Case Window) 이 일반적이었다. 오르내리창은 단열에 유리하고 여닫이창은 환기에 유리하다. 창문의 형태가 각 지역의 기후와 환경에 맞게 발전한 덕분이다. 최근에는 시스템 창이라는 이름으로 창문이 완전히 열리지 않는 형태가 많이 쓰이고 있다. 지역의 기후나 환경과 관계없이 냉난방 효율과 추락사고 방지의 목적이 가장 크다. 한국의 창문은 봉창, 바라지문 등 다양한 방식과 형태로 발달하기도 했고 기본적으로 미닫이창(Sliding Window)이 발전하기도 했다. 미닫이창은 여닫이창과 오르내리창의 장점을 고루 갖췄다. 고온다습한 한국의 여름에도 적합하고 추운 겨울에도 적합하다. 창살만 있고 유리나 종이로 덮지 않아 지속적인 환기와 채광을 추구한 봉창과 여름에는 활짝 위로 제쳐서 열어 두었다가 겨울에는 내려서 벽처럼 쓰기도 한 바라지문은 한국의 기후와 환경에 최적화된 형태이다.   건물을 지탱하는 벽에 구멍을 뚫으면 당연히 벽이 약해지고 건물이 무너질 수 있으므로 벽이 무너지지 않도록 지탱하는 인방보(Lintel)라는 방법이 개발됐다. 이 방식의 한계는 창문을 가로로 길게 내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동안은 세로로 창을 길게 내는 기술이 발전했다.  현대 건축의 아버지로 불리는 르코르뷔지에(Le Corbusier)가 벽이 아닌 기둥으로 건물의 하중을 지탱하는 ‘도미노 시스템’을 제안한 20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창문이 가로로 길어질 수 있었다. 우리에겐 익숙한 가로로 긴 창은 그래서 근대 건축의 상징이기도 하다.   르코르뷔지에의 파격적 선도로 창문을 벽 자체만큼이나 크게 만드는 것이 가능해졌다. 통유리벽이라는 창문과 벽의 경계를 허무는 파격적인  시도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결국 창과 벽은 하나가 될 수 없었다. 허물어진 실내와 실외의 경계가 우리를 너무 불편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다시 창은 벽 안으로 축소되었고, 심지어 최근 들어 점차 더욱 축소되는 추세이다. 다만, 최근의 추세는 실내와 실외 사이의 경계의 문제가 아니라 단열과 에너지 소비의 측면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창문은 각 방은 물론 건물 전체의 냉난방에 큰 영향을 끼친다. 한동안은 조망과 채광을 극단적으로 추구하고자 건물 외피의 대부분을 유리로 두르는 통유리벽(All Glass Curtain Wall)이 유행했다. 이런 방식은 조망과 채광에는 유리하지만, 실내 온도 유지에 막대한 에너지가 필요하다. 최근에는 건물 외부에 유리 대신 단열 성능이 우수한 재료가 사용되고 창문이 다시 작아지고 있다. 마찬가지로 오래된 알루미늄 새시는 점차 시스템 창호로 바뀌고 있다. 모두 건물의 냉난방에 사용되는 에너지를 줄이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다.   프랑스의 철학자 장 보들리야르는 “창문은 더 이상 공기와 빛의 출입에만 필요한 구멍은 아니다.”고 말했다. 보통 창은 실내와 실외를 나누는 문으로서, 채광과 환기를 위한 빛과 바람의 출구로만 여겨졌지만 실은, 우리가 이제껏 눈치채지 못 한 더 많은 기능과 의미가 담겨있다. 예술적으로 기능적으로 심지어 철학적으로까지 창의 역할은 다양하고, 그 의미가 깊다. 햇살 좋은 날 혹은 비가 창을 두드리는 날 아니면 찬 바람이 창을 스치는 날, 그 의미를 생각하며 창을 통해 전해지는 빛과 공기를 느껴보자.   자세한 내용은 월간 아이엑스디자인 3월호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Objet - 실용과 화목의 수호자, 주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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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노일영   실용과 화목의 수호자, 침실 -돌아온 대화의 공간 주방은 본질적으로 식생활을 영위하는 공간이지만 동시에 대화를 나누고 소통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다정하게 요리하는 부부와 식탁에 둘러앉아 화목한 시간을 보내는 가족이 주방을 상징하는 이미지인 것처럼 말이다. 오늘날 주방은 따듯하며 온화한 가정성의 상징과도 같이 여겨진다. 집의 중심부이자 일차적인 소통의 공간으로 온 가족이 모이는 거의 유일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한 세기 전만 해도 주방이 하인들만 드나드는 하찮은 공간으로 여겨졌다는 사실은 거의 잊혀졌다.   인류가 처음 자연에서 자신만의 공간을 만들었을 때에는 주방과 침실의 구분이 없었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집에 가까운 그 공간의 중심부에는 불이 있었다. 난로, 화로, 모닥불 뭐라고 부르든 공간의 중심에 불이 있었고 그 불로 요리를 하고 몸을 녹이고 불을 밝혔다. 유럽에서는 중세까지도 집안의 중앙 홀에 불을 피웠다. 하인들은 그곳에서 요리를 했고, 밤이면 추위를 피해 잠자리에 들었다. 지금과 가장 다른 것이 있다면 요리를 하던 하인들이 남자였다는 사실이다.  사실 오랫동안 주방에서 요리를 담당했던 건 남자였다. 특히 왕실이나 귀족의 주방을 책임진 주방장과 그들이 부리던 이들은 대부분 남자였다. 17세기 들어 시민계급이 성장하면서 남자들이 의사나 법률가 같은 더 주체적이고 매력적인 직업을 찾아 주방을 떠났다. 일부 왕실과 고위 귀족의 요리를 책임지던 소수의 최고급 남자 요리사만이 주방에 남았고, 결국 주방은 음식점과 여성의 몫으로 넘어갔다. 시간이 지나면서 주택의 중심 공간이었던 주방은 점차 주택의 주변으로 밀려났다.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는 화재의 위험이었다. 불은 요리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주택의 중앙에 자리 잡은 모닥불에서 화재가 발생하면 주택을 통째로 잃어야 했기 때문에, 주방은 점점 주택의 주변부로 밀려났다. 벽난로와 화로, 난로의 발전으로 체온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이 다양해진 탓도 있다. 화재에 대한 공포는 결국 주방을 집 밖으로 쫓아내게 만들었다. 귀족의 저택이나 궁전에서 마침내 주방을 따로 지어진 건물로 쫓아낸 것이다. 이런 조치를 통해 혹시라도 화재가 났을 때 다른 건물에는 피해를 주지 않을 수 있었다. 재밌는 것은 밖으로 쫓겨난 주방에서 점점 많은 일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식료품과 얼음을 저장하는 창고, 우유를 짜거나 치즈를 만드는 낙농장, 양조장, 탈곡장, 제빵소 등 실로 다양한 기능과 목적이 주방으로 집중됐고, 주방은 거의 작은 마을로 보일 정도로 커지기도 했다. 밖으로 쫓겨난, 좋게 말해 독립적인 주방은 18세기를 지나 19세기에도 여전히 집안으로 들어가지 못 했다. 특히 주인의 신분이 높을수록 주방과 저택의 거리는 멀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주방을 지저분하고, 시끄럽고, 쓰레기가 많이 나는 곳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품격있는 자신들의 생활 공간과 주방을 분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한편 18세기는 본격적으로 도시가 발전을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늘어난 인구에 걸맞은 공간을 확보하기 어려웠던 도시 사람들은 마침내 주방을 건물의 지하로 쫓아냈다. 19세기까지 품격과 거리가 멀다고 여겨져 지하와 밖으로 쫓겨나기만 했던 주방은 20세기에 들어 다시 주택 디자인의 중요한 요소로 부활했다. 가장 큰 이유는 제1차 세계 대전으로 노동인구가 줄고 인건비가 올랐기 때문이다. 주방에 들어설 엄두조차 내지 않던 가정의 안주인도 이제 주방에 들어가 요리를 해야 했다. 또 다른 중요한 원인으로는 환풍기의 발전을 들 수 있다. 환풍기의 등장과 발전으로 불쾌한 음식 냄새가 집 안으로 퍼지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도시형 공동 주택을 시작으로 작은 공간 안에 주방이 들어서기 시작한 것이다. 이 시기에 이르러 가정부와 하인의 공간이었던 주방이 드디어 주부의 공간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20세기 들어 높아진 주방의 위상은 다른 공간과 주방의 조화를 만들어냈다. 1960년대 영국에서는 예전 양식의 도시형 연립 주택을 개조하는 젊은이들이 크게 늘었다. 식기실, 주방, 식당 사이의 벽을 허물어 여러 개로 나뉜 주방 공간을 하나로 합쳤다. 바로 현대적인 오픈 플랜식 디자인의 등장이었다. 이 새로운 그러나 역사적인 공간의 구조는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냈다. 가족 구성원들이 주방에 드나드는 것을 꺼리지 않게 되었으며 주방을 더럽거나 품격이 떨어지는 공간이라고 인식하지 않게 된 것이다. “식사 공간을 종일 사용할 수 있도록 거실과 식당, 주방과 식당을 조합하는 방식의 가치를 충분히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영국의 디자인 브랜드 해비타트가 자신들의 주방 용품을 홍보하기 위해 사용한 문구다. 1970년대의 주방은 구조적으로 이전과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지만,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 벽돌, 나무와 같은 재료로 주방을 꾸미기 시작했고, 정직하고 소박한 분위기를 풍겼다. 튼튼하고 실용적이지만 소박한 멋이 있는 식기가 인기를 끌었다. 한국에 ‘시스템 키친’이라는 개념이 처음 들어온 시기, 1980년대에 주방은 다시 예전처럼 거실과 그리고 식당과 하나가 되었다. 부유한 집주인들은 주방에 많은 돈을 쓰기 시작했다. 값비싼 가구, 주방용품과 최신 기계들은 주방에 실용성과 심미적 아름다움을 더했다. 주방은 점차 세련되고 모던해졌으며 부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많은 돈을 써서 만든 화려하고 미끈한 주방은 오히려 집주인이 요리를 하지 않는다는 상징이기도 하다. 그렇게 비싼 주방의 주인들은 보통 직접 요리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주방의 최우선 가치는 실용과 효율이었다. 불을 다루고 음식을 만드는 주방은, 일종의 기관실과도 같은 곳이었다. 승객이 아닌 선원이 가는 곳 말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주방은 기계적이고 기술적인 작업, 요리가 이루어지는 실용적인 곳이며 동시에 온화하고 단란한 가정을 상징하는 따듯한 공간이 되었다. 냉장고에 붙어있는 가족사진과 매혹적인 향기를 풍기는 가스레인지가 바로 지금의 주방을 대표하는 장면일 것이다. 냉장고라는 실로 차가운 기계에 붙여진 행복한 가족사진이야말로 주방 그 자체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 아이엑스디자인 2월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Objet - 꿈꾸는 작은 우주, 침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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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노일영   꿈꾸는 작은 우주, 침실 -기록되지 않은 공간의 역사 인생의 3분의 1은 잠이다. 인류 역사의 3분의 1도 우리가 자는 동안에 지나갔다. 그래서 역사의 3분의 1은 기록되지 않은 시간이며 기록되지 않은 역사이기도 하다. 이 기록되지 않은 역사가 이루어진 곳은 주로 침실이었고, 우리가 그만큼의 시간을 보내는 곳도 침실이다. 침실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고 당연한 일이다. 우리 삶의 커다란 일부를 이야기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편으론 낯설고 심지어 수줍기도 하다. 침실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사적이고 내밀하며 신성하기 때문이다. 매일 따뜻한 잠자리와 먹거리에 대해 고민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 시기에 잠자리는 외부의 위험과 추위로부터 몸을 보호하는 공간 즉 현대적 의미의 집 그 자체였다. 잠자리가 있는 곳이 집이었고 집이 잠자리였다. 이 시기에 인류는 출생에서 임종까지 인생의 모든 시간을 하나의 공간에서 보냈다. 잠을 자고 음식을 먹는 기본적인 생활부터 아이를 낳거나 임종을 맞이하는 일생일대의 모든 사건이 한 장소에서 일어났다. 공간이 목적과 기능에 따라 분리되기 전까지 침실과 거실과 부엌은 모두 하나였기 때문이다. 잠자리에서 모든 사건이 벌어졌으며, 모든 문제가 일어났고 또 해결됐다. 침실이라는 이름과 그 개념은 사생활이라는 말과 떨어질 수 없는 관계다. 중세시대까지 사생활이라는 개념은 존중받지 못 했다. 집안의 거의 모든 식솔들은 커다란 주택의 한가운데 넓은 공간에 모여서 함께 잤다. 불을 피워두곤 했기 때문에 연기와 냄새가 가득하고 불편했겠지만, 적어도 온기와 안전을 위해서는 함께 모여서 자는 것이 바람직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개인의 사생활보다는 공동체가 더 중요했고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15세기 즈음 오늘날 침대라고 부를만한 것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전까지 귀족이 아닌 이들은 보통 맨바닥에서 잤다. 이때의 침대는 많은 이들이 함께 사용해야 했기 때문에 지금보다 훨씬 컸다. 침대가 만들어지자 침대에서의 규칙과 예절이 생겨났다. 많은 이들이 함께 모여서 잠을 잤기 때문에 사적이라기보다는 공용의 성격이 짙었다. 침대에 눕는 순서가 관습적으로 정해졌고 침대를 관리하는 일이 중요한 일과의 하나가 되었다. 물론 불편했겠지만 적어도 바닥에서 자는 것보다는 훨씬 푹신했을 것이다.  대부분의 이들이 맨바닥에서 함께 모여 잠을 잤지만, 귀족들은 진작부터 따로 잠을 잘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다. 지금 보기에는 다소 조잡한 침대를 만들고 침대 주변에 네 개의 기둥을 만들어 커튼을 두르곤 했다. 당시의 침대라고 해봐야 건초나 짚을 채워 넣은 자루일 뿐이었지만 온기를 지키기에는 바닥보다 훨씬 좋았다. 침대 주변에 두른 커튼은 사생활을 보호하는 역할도 했겠지만, 오히려 외부의 찬 공기를 막기에 더 좋았다. 어쨌든 덕분에 조잡하나마 부유한 부부는 둘만의 공간을 만들 수 있었고 둘만의 사생활을 가질 수 있었다. 은밀한 공간은 딱 침대 만했다. 당시에 귀족들이 침대를 놓던 곳을 침실이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오히려 집무실, 서재, 거실, 침실의 기능을 합친 다목적 공간이라 부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귀족들이 신분이 낮은 다른 이들과 자신들을 구분하기 위해 사용한 방법은 방을 따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2층 저택의 2층을 통째로 쓰는 것이었다. 여전히 집 전체가 방 하나로 여겨졌고 침실이 아닌 침대만 있을 뿐이었다. 사생활이라는 개념 자체가 희박했던 시기였던 만큼 귀족들조차 ‘남몰래’ 어떤 일을 한다는 것은 어려웠다. 모든 생활은 공개적이었고 사회적이었다. 17세기에도 여전히 침대는 모두의 것이었고 침실은 특별한 공간이 아니었다. 그러다 17세기의 막바지에 복도가 등장하면서 모든 방과 방이 나뉘고 독립적인 공간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각각의 방을 특별한 기능으로 나누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잠을 자는 공간인 침실이 생겨났지만, 여전히 사회적 성격이 남아있었다. 친구들과의 모임이나 각종 업무를 보는 등의 기능은 아직 분리되지 않은 채 침실에 남아있었다. 카드놀이와 다도를 즐기는 곳도 침실이었다. 침실이 오로지 취침만을 위한 곳이 된 것은 한참 후에 일어난 일이다.  18세기, 프랑스 루이 15세의 정부였던 퐁파두르 부인은 베르사유 궁전을 개조해 곳곳에 작은 방을 만들었다. 인테리어에 관심이 많았던 그녀는 이렇게 만들어진 방들을 섬세하게 장식했다. 충분히 여성스러운 분위기, 조개 무늬와 소용돌이 무늬, 이국적인 벽지 등으로 화려하게 꾸며진 이 방은 사용하는 이의 품위를 지키고 사생활을 보장할 수 있는 사적인 공간으로 만들어졌다. 비로소 현대적 의미의 침실이 탄생한 것이다. 이때 만들어진 방들과 그 장식들은 훗날 ‘로코코’라 불리는 양식의 전형이 되기도 했다. 퐁파두르 부인이 만들어낸 침실은 사실 취침보다는 다른 목적을 주로 갖고 있었다. 때문에 지극히 여성적이고 아주 내밀한 공간이었다. 이 특색은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여성의 사적이고 은밀한 영역으로 발전한 침실이 가정에서 가장 특별하고 고급스러우며 섬세한 공간이 된 것이다. 최신형 TV와 값비싼 오디오, 커다란 소파와 거대한 장식품 등으로 과시적인 남성성을 드러내는 거실과 비교되는 부분이다. 침대 주변의 가족사진과 추억이 담긴 물건들은 이 공간의 사적 내밀함과 신성함을 잘 보여준다. 프로이트는 침실을 부인, 아내와 특히 연관 지어 이해하곤 했다. 19세기는 고전적 보수주의와 도덕주의, 화려한 양식과 산업 발전의 시기였다. 건축과 가구는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하고 정교해졌다. 이 시기에 드디어 침실이 오직 취침만을 위한 공간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당시 남성과 여성을 엄격히 분리하던 사회적 분위기 탓에, 남자와 여자가 같은 침실을 쓰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일로 여겨졌다. 남자 하인과 여자 하인의 잠자리가 따로 만들어졌고 마찬가지로 상류층의 남편과 아내가 한 침대를 쓰는 것, 나아가 한 침실을 쓰는 것조차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여겨지게 됐다. 덕분에 20세기 초까지도 중류층 부부들은 한 침실에 두 개의 1인용 침대를 놓곤 했다.  20세기 초 할리우드 영화에 침실이 등장하기 전까지 침실은 지극히 사적인 공간이었다. 침실에 대해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부끄러운 어떤 것이었다. 그러나 영화를 통해 침실은 욕망의 상징으로 대두했다.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의 방식으로 표현한다면, 당시의 영화들은 무엇을 욕망해야 하는지와 어떻게 욕망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었다. 할리우드 영화 속 침실은 부드러운 실크 잠옷과 호사로운 새틴 재질의 나이트가운을 걸친 스타들의 공간, 화려한 소품과 고급스러운 가구가 놓인 환상적인 공간이었다. 영화를 본 여성들은 영화나 영화배우보다 그들의 침실에 더 주목했다. 사실 침실이라는 개념이 생기고 침실에 중요한 위상이 생긴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침실이 본격적으로 다른 공간들과 분리되어 사적인 공간으로 취급된 것이 불과 19세기의 일이다. 이전까지 수면을 목적으로 한 특별한 공간은 필요하지 않았거나 없었다. 모든 공간은 공동체적이고 사회적이었다. 그러다 거주 공간에서 벌어지는 쉬는 일, 먹는 일, 책을 읽거나, 게임을 하거나 혹은 파티를 즐기고 잠을 자는 등의 모든 일들을 위한 각각의 독립적인 방이 생겨났다. 침실도 마찬가지였다. 침대가 있는 독립적인 방이라는 개념의 침실은 실은 굉장히 근대적인 개념인 것이다. 현대에 이르러 침실에서 아이를 낳거나 임종을 맞이하는 일은 더이상 익숙한 일이 아니다. 이제 그런 중요한 사건들은 침실을 벗어나 병원에서 일어나는 일이 되었다. 그럼에도 침실의 역할이나 중요성은 조금도 떨어지지 않았다. 여전히 우리가 침실에서 잉태되는 까닭이다. 집 자체였던 침실이 집의 일부로 축소되면서 만들어진 집이라는 완충지대가 덕분에 침실은 더욱 사적이고 내밀한 공간이 됐다. 침실은 집 안의 집, 내부의 작은 우주가 되었다. 이 작은 우주가 수면과 또 부부만의 시간과도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침실은 진정 행복한 곳, 가장 자유롭고 편안하게 꿈꿀 수 있는 공간이어야 한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 아이엑스디자인 1월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Objet - 지성과 감성 사이,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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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노일영   지성과 감성 사이, 서재 - 비밀과 균형의 공간 벽과 문으로 구분되는 가정 내의 많은 공간 중에서도 서재는 가장 지성적이고 내밀한 공간이다. 누군가의 서재를 상상해보자. 서재에는 주인의 존재를 정의하는 물건이 가득할 것이다. 책장에 꽂힌 도서들은 주인의 관심사와 지적 수준을 드러낼 것이고 장식품과 예술 작품은 주인의 취향과 추구하는 미적 지향을 보여줄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서재는 가정 내의 다른 공간과는 다르게 일, 업무와 관련이 깊은 곳이기도 하다. 모바일오피스, 홈오피스가 보편화된 요즘에는 집 안에 업무를 위한 공간을 따로 두거나 집 안에서 업무를 처리하는 것이 어색하지 않지만, 사실 이런 경향은 지극히 최근의 일이다. 유럽에 처음 서재가 등장한 것은 15세기 무렵이었다. 부유한 귀족들이 침실과 가까운 곳에 방을 따로 만들어 화려하게 장식하기도 하고 귀중품을 보관하면서 별실이라는 공간이 생겨났다. 침실보다도 더 내밀한 공간으로 만들어진 별실은 주로 기도를 하거나 독서, 명상을 즐기는 공간으로 활용됐다. 지극히도 사적인 용도로 쓰이던 별실은 곧 남에게 보여줄 필요가 없는 취향으로 가득 차기 시작했고 진귀한 예술품이나 보석, 악기나 서적 등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별실이 처음 생겨나던 15세기에 73권으로 만들어진 성경 1질을 사기 위해서는 집 10채 값의 가격을 지불해야 했다. 개인이 다양한 서적을 소유한다는 것은 당연히도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중세의 막바지에 이르러, 구텐베르크의 인쇄술로 도서가 대량으로 보급되면서 개인이 서적을 손쉽게 소장할 수 있게 되었다. 집 안에 전용 별실을 만들 수 있을 정도의 경제력을 가진 이들은 때마침 불어닥친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의 영향으로 지식과 학문을 탐닉하면서 다량의 서적을 수집했다. 가격이 내려갔지만, 여전히 귀했던 책들은 별실로 옮겨져 보관됐다. 어떤 이들은 은밀하게 장부를 작성하거나 돈을 계산하기 위해, 또 어떤 이들은 사적인 편지나 일기를 쓰기 위해 이 별실을 애용했다. 들키고 싶지 않은 비밀스러운 취미를 즐기거나 내밀한 시간을 보내기에도 별실은 완벽한 장소였다. 이 매력적인 공간은 점차 화려하고 멋지게 꾸며지기 시작했다. 화려한 그림과 장식품으로 채워지기도 했고 다양한 종류의 양서가 벽을 채우기도 했다. 주인의 취향에 따라 점차 별실은 현대적 의미의 서재가 되거나 갤러리, 혹은 창고로 변하기도 했다. 현대적인 의미의 서재가 탄생한 것은 어쩌면 구텐베르크에게 가장 큰 공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중세가 끝나가고 근세에 접어들 무렵, 도서의 대량보급으로 그 어느 때보다 지식인 계급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 새로운 유형의 사람들은 작고 조용한 방에서 혼자 보내는 시간을 좋아했다. 유례없이 고독과 사색을 즐기는 인간이 탄생한 것이다. 그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작고 내밀하며 충분히 사적인 공간이었다.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공간, 사색과 사유의 공간으로서의 서재가 비로소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주인의 지성을 상징하는 공간으로서 서재는 전통적으로는 서적, 현대적으로는 컴퓨터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또 장부를 정리하거나 글을 쓰는 행위, 컴퓨터 앞에 앉아 하는 행위 등이 모두 업무, 일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다는 점에서 서재는 집안에 들어선 사무실이기도 하다. 가장 내밀한 공간인 동시에 업무를 처리하는 공적 행위가 이루어지는 장소라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때로는 사회와 가정 모두에서 분리된 완벽한 도피처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집에서 업무를 보며 지루한 시간을 보내는 독특한 공간이 바로 서재다. 골치 아픈 여러 문제에서 벗어나 혼자만의 내밀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장소, 일상생활과 분리된 공간으로서의 서재는 요즘 들어 그 역할이 크게 축소됐다. 홈오피스의 보편화로 서재의 역할이 확연히 줄어든 것이다. 책장과 책상이 있던 독립된 방은 아예 집 안에서 사라져버리거나 혹은 일상과 업무가 혼재된 기이한 공간으로 변했다. 책장과 책상은 점차 노트북과 와이파이로 대체됐다. 단, 고독과 사색은 대체되지 않은 대신 거의 사라져버렸다.  공간이 귀한 소형 아파트나 원룸에선 책상 대신 다용도 테이블을 놓고 식탁, 책상, 작업 테이블 등 다양한 용도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다. 책장 대신 장식장이나 선반을 두기도 하며 책장을 장식장으로 쓰기도 한다. 책의 역할과 가치가 축소된 만큼, 서재도 축소되거나 사라져 서재의 기능이 집 전체로 흡수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집 전체가 일하는 공간으로 변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리고 집에서 책을 보는 사람보다 집에서 일하는 사람이 많아졌다는 말이기도 하다.  홈오피스의 대중화는 집을 휴식하는 곳이 아닌 일하는 곳으로 만들었다. 거실 한편에 테이블과 노트북을 놓고 일하는 이들도 있고 침실이나 작은 공간에 파티션이나 커튼으로 공간을 분리해 사용하는 이들도 있다. 집 안에 작업 공간을 만드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일상과 아주 가까운 곳에 일의 무게를 함께 둔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활과 휴식, 업무와 여가의 사이에 일이라는 무거운 짐을 들이려 한다면 신중해야 한다. 집에서 일하는 사람이 늘어난다는 말은 여가시간을 일로 보내는 사람이 늘어난다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공부방과 침대방을 따로 줄 수 있는 여유가 있다면 따로 주는 것이 좋다. 책장과 책상이 있는 공부방은 아이가 스스로 공부와 휴식 사이에서 적당한 균형을 잡을 수 있게 도와줄 것이다. 균형을 잡을 줄 모른다는 것은 위태로운 일이다. 어른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노동과 휴식 사이의 균형은 사적 공간과 공적공간, 서재와 집 전체 그리고 업무와 여가 사이의 균형과도 같다. 포근하고 안락해야 할 집을 일만 하는 공간으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는 서재라는 균형이 필요하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 아이엑스디자인 12월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Objet - 여유로운 생활의 시작과 끝, 욕실 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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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노일영   여유로운 생활의 시작과 끝, 욕실 II - 청결과 휴식의 공간   여유로운 생활의 시작과 끝, 욕실(2) -청결과 휴식의 공간 아마포(linen, 리넨)를 뜻하는 프랑스어 ‘toile’에서 모종의 역사적 과정을 거쳐 현대적 화장실을 뜻하는 영어 단어 ‘toilet’이 탄생했다. 수세식 변기는 19세기 후반에야 인기를 얻기 시작했고 세면대와 수세식 변소가 하나의 방으로 만나게 된 것은 20세기 초반의 일이다. 욕조, 세면기, 수세식 변기가 함께 있는 욕실이라는 요즘의 서양식 건축이 보편화 된 것은 서양에서도 최근, 20세기 중반에나 이루어진 일이다. 1700년대 영국 하노버 왕조 시대의 침실 한구석에는 화장대와 세면기가 나란히 있었다. 세면기는 실상 커다란 그릇 모양으로 삼발이 받침대 위에 올려져 있었는데 보통 세면기에 있는 물로 아마포를 적셔 몸을 닦고는 했다. 목욕이 거의 금기시 되었던 19세기 중반까지의 사회적 분위기 탓이다. 화장대에는 거울, 향수, 솔과 같은 화장용품이 올려져 있었다. 화장대와 세면기가 함께 있었다는 점에서 씻기와 꾸미기의 기능이 함께 있는 오늘날 현대적 욕실의 모태를 볼 수 있다. 중세에는 많은 사람이 배변을 위해 자연을 이용했다. 삽을 이용해 땅을 파고 다시 덮거나, 흐르는 물로 흔적을 남기지 않기도 했다. 신분제 사회에서 신분이 낮은 이들은 옥외 변소와 공동변소를 사용했고 신분이 높은 이들은 특별히 만들어진 변소에서 실내용 변기나 전용 요강을 사용했다. 변소에는 암모니아가 가득했기 때문에 벼룩을 죽일 수 있어 옷을 보관하는 용도로 쓰기도 했다. 때문에 중세 유럽에서는 변소를 옷방이라 부르기도 했다. 은밀하게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으로 실내용 변기와 요강은 수백 년간 사용되었다. 현대적인 수세식 화장실이 본격적으로 인기를 끈 것은 19세기에 들어 이루어진 일이다. 1840년대 S형 배수관 위에 조잡한 도자기 재질의 변기가 올려진 현대적 형태의 수세식 변기가 등장했지만 많은 이들은 여전히 침실에서 요강을 사용했다. 변기를 사용하는 모습을 남들이 볼 수 없는 욕실 혹은 화장실이라는 닫힌 공간이 생기기까지는 이후로도 긴 시간이 걸렸다. 19세기 유럽의 도시에 수도관이 도입되면서 주택 내부에 욕실이 따로 생기기 시작했다. 그전까지 침실과 욕실 그리고 변소는 하나였다. 침실 한편에는 상단에 세면대를 놓고 하단에 요강을 두는 이동식 가구가 있었다. 세면기와 변기를 가까이 두는 건축 양식이 여기서 시작됐다. 19세기 중반에서 후반으로 넘어가며 침실과 분리된 욕실이 유행하기 시작했고, 동시에 ‘씻기’라는 행위가 사적이고 은밀한 행위라는 인식이 생기기 시작했다. 욕실에 마침내 잠금장치가 생기기 시작했다. 사적인 공간임을 더욱 강조하는 침실에 딸린 전용 욕실은 미국에서 처음 시작되었고 1920년대에 이르러는 미국 내 대부분 호텔에 설치되었다. 지나친 청결을 퇴폐적으로 보는 보수적인 유럽인들은 물론 청교도적 전통을 간직한 미국인들에게도 침실 전용 욕실은 다소 선정적인 인상을 풍겼다. 로마 시절부터 내려온 공중목욕탕이라는 전통이 사적인 욕실을 부정적으로 보는 생각의 근원이었을까. 그러나 지금 서구식 문명을 받아들인 거의 모든 곳에서 욕실은 사적인 공간으로 취급된다.  20세기가 되면서 욕실은 주택 건축의 상징으로 빠르게 변화했다. 온수와 냉수가 나오는 파이프, 욕조, 세면기, 샤워기, 수세식 변기까지 하나로 합쳐지며 건축적 미학의 실험실과도 같이 변화했다. 기능주의적 미학을 드러내던 흰색 타일, 도기 제품은 이후 병원의 상징으로 옮겨갔고 이후로는 가정생활의 욕망을 드러내는 화려하고 세속적인 공간으로 변하고 있다. 최근 욕실에 휴식의 기능이 강조되는 것도 이러한 분위기의 연장일지 모른다. 사회적 욕망이 휴식을 바라는 것은 아닐까. ‘씻다’, ‘몸을 꾸미다'라는 프랑스어 ‘toilette’은 아마포를 뜻하는 ‘toile’에서 나왔다. 화장실과는 무관한 말이었던 ‘toilette’이 화장실을 뜻하는 영어 ‘toilet’이 된 것은 열차의 발전 덕분이다. 초창기의 열차에는 세면기가 있는 ‘toilet’과 수세식 변소가 있는 ‘water closet’이 각자 독립적인 객실에 있었다. 두 객실 모두 물을 사용한다는 공통점으로 둘을 합쳐 하나의 객실로 만들었을 때, 비교적 사려 깊은 느낌의 ‘toilet’이라는 이름이 남았고 아직까지 그 이름이 사용되고 있다. 이 흥미로운 결합은 20세기 미국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한국에 지금과 비슷한 형태의 세면기, 변기, 욕조가 함께 있는 욕실이 처음 만들어진 것은 1962년 서울의 한 아파트에서였다. 1962년이라니 너무 늦은 것 같지만, 영국의 고급 호텔에 처음 현대적인 욕실이 들어선 것은 1920년대였고 1930년대까지도 유럽의 주택에는 대부분 샤워기가 없었다. 역사적으로 사람들이 욕실에 관심을 두기 시작한 것은 지난 수십 년과 현재가 거의 전부일지도 모르겠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 아이엑스디자인 11월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Objet - 여유로운 생활의 시작과 끝, 욕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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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노일영 여유로운 생활의 시작과 끝, 욕실 - 청결과 휴식의 공간 욕실이 변하고 있다. 매일 하루 일과를 준비하고 마무리하는 곳이 욕실인 만큼 개인의 라이프 스타일과 취향에 맞춰 다양한 모습으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욕조 혹은 샤워부스, 세면대는 물론이고 스팀 시설이 있는 전용 사우나부터 최신식 월 풀 욕조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만의 욕실을 만들어가고 있다. 욕실을 꾸미고 자신의 생활 방식에 맞추는 것에는 다양한 방법이 있고 그보다 더 다양한 의미가 있다. 온탕에 들어가 몸의 노폐물을 물에 불린 후 목욕 타월이나 때 타월 등으로 몸을 문질러 노폐물을 제거하는 전통적인 방식의 목욕은 몸이 완전히 물에 잠길 수 있는 욕조가 필요하고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단점이 있다. 현대에는 간편하게 서서 할 수 있는 샤워가 보다 보편적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심플하고 세련된 순백의 욕조는 몸을 담그지 않고서는 참을 수 없게 만드는 매력을 가졌다. 욕실을 꾸미기 전에 선호하는 스타일과 개성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샤워와 목욕은 다르기 때문이다. 샤워는 다음의 일을 준비하는 과정이다. 이후에 있을 일정을 위해 빠르고 간편하게 몸을 씻어내야 한다. 샤워의 미덕은 그래서 신속함이고 욕실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지 않아야 한다. 반면 목욕은 여유롭게 욕조에 몸을 담근 채 휴식하는 시간이다. 샤워 부스와 욕조 중 선호하는 스타일이 곧 욕실의 스타일이 된다. 샤워 시설, 세면대가 전부인 평범한 인테리어라도 샤워 시설과 세면대 사이에 커튼이나 유리 벽을 설치하면 공간을 분리할 수 있다. 화이트 톤을 사용하면 심플하고 세련된 느낌을 줄 수 있다. 벽과 바닥에는 일반적으로 타일을 사용하지만 대신 페인트와 에폭시를 사용하면 거칠면서도 세련된 감성을 살릴 수 있다. 방수만 확실하다면 바닥에 굳이 타일을 깔아야 할 필요는 없다. 다만 페인트로 칠한 벽은 타일에 비해 습기에 약하기 때문에 유지 보수가 까다롭다. 요즘은 건식으로 욕실을 인테리어 하는 경우가 늘었다. 한국의 욕실은 보통 습도가 높은 것이 특징이지만 유리 벽면을 이용해 욕실 전체 공간과 샤워 룸을 분리하면 샤워 룸을 제외한 나머지 공간을 건조하게 유지할 수 있다. 욕실을 건식으로 만들면 곰팡이 걱정이 없고 습도가 낮아 쾌적하게 이용할 수 있다. 단, 늘 물기가 많은 샤워 룸은 유리, 타일 등을 이용해 방수와 청결을 유지해야 한다. 작은 공간을 세련되게 꾸미는 방법은 이웃 나라 일본에서 배울 점이 많다. 집의 규모가 작아도 혹은 욕실이 작아도 얼마든지 깔끔하고 세련되게 꾸밀 수 있다. 가장 기본적인 화이트톤으로 욕실을 꾸미고 조명을 조절하는 것만으로도 작은 욕실이 세련되게 바뀔 수 있다. 보통 욕실에는 노란빛이 강한 조명을 쓰는데 조명을 흰색으로 바꾸는 것만으로 훨씬 분위기가 세련되어지고 깔끔해 보인다. 얼마 전까지는 욕조를 철거하고 샤워 부스를 설치해 깔끔하고 세련된 분위기를 내는 경우가 많았는데 최근에는 다시 욕조를 설치하는 추세가 두드러진다. 웰빙과 힐링을 위해 욕조에 들어가 휴식을 취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하얗고 깔끔한 욕조뿐 아니라 월풀 욕조를 설치하는 경우가 많아진 것도 최근의 추세이다. 월풀 욕조는 마사지 기능이 있어 피로와 스트레스를 풀어주고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느끼도록 도와준다. 욕실에 욕조가 돌아오면서 건축에도 변화의 조짐이 보이고 있다. 필요한 것들이 자리할 수 있는 만큼, 최소한의 것들만 갖출 수 있도록 작게 만들던 욕실이 조금씩 커지고 있다. 욕실에서 보내는 시간이 낭비하는 시간이 아닌 휴식과 충전을 위해 꼭 필요한 시간이라는 인식이 널리 퍼지고 있는 덕분이다. 빠르게 샤워를 하고 급하게 볼일을 보고 나오는 공간이 아닌 삶의 여유를 상징하는 공간이라는 인식이 넓어지는 만큼, 딱 그만큼 욕실도 넓어지고 있다. 건식으로 욕실을 인테리어하거나 욕실의 규모를 늘리는 것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욕실과 화장실, 리빙 룸의 경계를 허무는 경우도 있다. 따로 욕실을 만들지 않고 생활 공간과 한데 어우러지게 하면 오히려 정갈하고 세련된 느낌을 준다. 전체적인 공간의 분위기를 해치지 않고 어울리는 선에서 공간을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다. 고정식이 아닌 이동식 샤워 부스는 공간을 창의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돕는다. 욕조와 세면대, 변기로 이루어진 단순한 욕실을 특별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벽면과 바닥의 타일을 독특하게 바꿔 볼 수도 있지만, 벽에 액자나 소품을 설치하는 것만으로도 분위기를 바꿀 수 있다. 욕실을 리모델링 하거나 타일을 새로 시공하는 것이 부담스럽다면 액자 같은 작고 깔끔한 소품으로 분위기를 살려보자. 욕실 코팅은 저렴한 가격으로 간편하게 오래된 욕조를 다시 새것처럼 하얗게 만들 수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빛이 바랜 욕실의 분위기를 바꾸는 데에 가장 효과적이고 간편한 방법이다. 욕조뿐 아니라 세면대와 변기도 코팅을 새로 하는 것만으로 새것처럼 바뀐다. 욕실 인테리어의 기본인 화이트 톤으로 꾸며진 새하얀 욕조와 세면대는 청결하고 깔끔한 인테리어와 주인의 성격을 무엇보다 가장 잘 보여준다. 욕실이 좁아 욕조를 설치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이동식 욕조를 사용하면 공간을 보다 창조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침실에 욕조를 놓으면 최적의 휴식 공간으로서 공간을 활용할 수 있고 야외가 보이는 창가에 욕조를 설치하면 경치를 보면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낼 수도 있다. 이동식 욕조를 사용한다면 아파트 베란다에 설치한 욕조에서 야경을 보며 하루의 피로를 푸는 영화 속 한 장면도 거리가 먼 이야기는 아니다. 공간이 충분하다면 샤워부스와 욕조를 함께 설치하는 것도 좋다. 샤워와 목욕의 구분이 확실한 만큼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부스와 욕조를 쓸 수 있기 때문이다. 미끄럽고 좁은 욕조에 서서 위태롭게 샤워를 하는 것보다 심지어 안전하기까지 하다. 단, 공간이 넓어야 하고 건식으로 욕실을 꾸미기가 힘들다는 단점이 있다. 매일 두어 번은, 적어도 한 번은 반드시 들려야 하는 곳. 매일 아침 일터에 나갈 준비를 하며 몸을 깨끗이 하고 매일 저녁 편안한 잠자리를 위해 하루의 피로를 씻어내는 곳. 청결과 힐링의 상징과도 같은 그곳. 바로 욕실이다. 매일의 시작과 끝을 함께하는 욕실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개성에 맞춰 꾸미기를 주저하지 않는다면 삶이 더 풍요로워질 것이다. 욕조는 어떤 이들에게는 휴식처가 되기도 하고 어떤 이들에게는 놀이터가 되기도 한다. 아이들에게 혹은 어른들에게도 욕조는 훌륭한 놀이터가 된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 아이엑스디자인 10월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Objet - 혼란에서 안정으로 들어가는 입구, 현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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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노일영   혼란에서 안정으로 들어가는 입구, 현관문 -경계와 연결의 교차 건물의 입구, 특히 주택의 문은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을 구분 지어주는 교차점이자 외부의 혼란과 내부의 안정의 교차점이다. 혼란스러운 바깥 세상과 안전하고 평화로운 안을 구분하는 동시에 이어주는 상징적인 공간이다. 입구, 문은 그래서 문화와 역사, 의미와 상징을 담은 인문학적 오브제이며 동시에 안전과 방어를 책임지는 기능적인 오브제로서 존재한다.    역사적으로 오래된 건축물의 입구는 보통 태양이 뜨는 방향, 동쪽을 향하고 있다. 동쪽을 향해 문을 내는 것은 매일 아침 떠오르는 태양과 함께 새롭게 시작하는 하루에 대한 감사함, 그 성스러운 의미에서 시작됐다. ‘경향’, ‘지향’을 의미하는 단어 ‘오리엔테이션(Orientation)’의 ‘동쪽을 향한다’는 원래 의미 또한 같은 유래에서 출발했다.  풍수지리에서는 현관문과 대문의 방위, 위치를 중요하게 여기고 건물과 현관문의 크기 비례를 중요하게 여긴다. 현관문과 대문의 방향에 따라 건물에 복이 들어오거나 흉이 들어오는 것이 결정될 수 있고 현관문의 크기가 건물의 크기와 비례가 맞지 않으면 옹졸하거나 헤픈 인상을 줄 수 있다고 한다.    아파트에서는 대문이 사라지고 현관문이 그 역할을 대신한다.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 사이에서 완충 역할을 하던 울타리와 대문, 마당이 사라진 아파트에서는 현관문이 그 역할을 한다. 현관문의 역할은 커지고 중요해졌지만 관심은 그만큼 커지지 않았다. 대부분의 현관문이 똑같이 생긴 것은 어쩌면 몰개성과 익명성의 시대적 상징일 것이다.  전통적으로 건물의 입구, 현대의 현관문은 주인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이고 어떤 건축물인지를 방문객에게 전달하는 일종의 비언어적 표현이었다. 때문에 문에는 여러 장식적 요소가 많았고 인간적인 특징과 상징이 많이 담겨 있다. 보통 문의 전면에 덧댄 벽 널은 사람의 머리, 몸통, 다리의 비율에 맞춰져 있으며 손잡이는 배꼽의 높이와 비슷하다.     현대의 아파트 현관문은 주인에게 거의 선택권이 없다.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문의 외부에는 종교 스티커가 거의 전부이다. 그러나 개성있는 장식으로 내부를 꾸미는 이들은 꾸준히 늘고 있다. 리폼 스티커나 시트를 붙이기도 하고 페인트 칠을 하거나 나무를 덧대 새로운 분위기를 내기도 한다. 안으로 꾸며진 현관문은 가정의 분위기를 좌우한다.  현관문을 꾸미는 것은 주인의 개성과 인격을 겉으로 전시하고 소망을 내부로 표출하는 행위이다. 간과하기 쉬운 그 중요성을 인식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는 것은 그래서 환영할 일이다. 절반은 공적이고 절반은 사적인 현관문이 다채로워지는 것은 적어도 사회와 가정이 내부로 다채로워지고 아름다워지고 있다는 방증이기 때문이다.   서로가 익명의 타자로 존재하는 현대 사회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은 일종의 금기와도 같다. 눈의 띄거나 돋보이는 것은 약점을 노출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개성있는 현관문이 늘어나는 것은 그래서 공동체 의식의 부활이기도 하다. 서로를 믿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현관문을 꾸미는 행위는 그래서 한편으로 숭고하기까지 하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 아이엑스디자인 9월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Objet - 계단, 건축공간의 높은 콧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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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노일영 계단, 건축공간의 높은 콧대 이동 수단 이상의 의미 계단은 그 위치, 목적, 높이 등에 따라 다양한 구조와 소재로 만들어진다. 실내인지 실외인지, 사용자의 연령대 심지어 사용자의 지위에 따라서도 다양하게 만들어진다. 사용자에 따라, 공간에 따라 분위기를 조성하고 미적 오브제로서 공간을 완성하기도 한다. 오르기 위해 존재하기도 하며 걸터앉아 쉬기 위해 존재하기도 한다.   계단은 머무는 공간이 아닌 거쳐 지나는 공간이다. 일상생활을 하면서 우리가 계단 위에서 보내는 시간은 많지 않다. 그러나 계단은 건축공간에서 가장 입체적인 조형물이다. 계단 디자인에 따라 건축의 인상이 달라지고, 사용자의 시야와 감정도 변한다. 계단 위에서 보내는 시간은 적지만 계단을 보면서 지내는 시간은 많기 때문이다.   얼굴의 중심에서 사람의 인상을 결정하는 코처럼, 위와 아래, 수직을 연결하며 건축공간의 인상을 결정하는 계단. 높이가 다른 두 바닥, 층과 층을 연결하는 기능적인 면뿐만 아니라 미학적 기능도 중요한 것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올림픽 시상대의 가장 높은 자리는 경쟁에서 승리한 자가 차지한다. 고대로부터 인류는 힘을 과시하기 위해 높은 구조물을 만들고 그 위에 서고자 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수직으로 쌓아올린 고대의 유적들이 그렇게 만들어졌다.   수직으로 하늘을 향하던 계단은 중세시대에 이르러 나선형 계단으로 몸을 튼다. 나선형 계단은 성을 방어하는 원형 탑과 함께 군사력의 상징이 되었다. 탑 안으로 설치된 계단은 겉으로는 보이지 않았지만, 여전히 권력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르네상스 시대에 접어들자 계단은 점점 다양해졌다. 개방형 사각 회전 계단, 유턴 계단, 개방 나선형 우물 계단 등 다양한 종류의 계단이 생겨났다. 계단의 구조와 모양만큼 계단의 의미도 다양해졌다. 계단이 권력의 상징, 군사력의 상징에서 예술가와 건축가의 작품으로 바뀐 것이다.   계단의 절대적인 기능이 수직 이동이기는 하지만 계단은 때때로 스스로 예술이 되거나 예술의 배경이 되기도 하고 또 때로는 거대한 의자가 되어 휴식과 모임의 장소가 되기도 한다. 계단을 단편적으로 이해하고 설명하는 것이 힘든 까닭이다.   계단은 시민이 이용하는 공공재가 되었고 예술가와 건축가의 철학이 묻어나는 작품이 되었다. 덕분에 계단은 이제 건물에 활력을 주는 존재가 되었다. 그리고 좋은 계단은 건축뿐만 아니라 사용자에게도 활력을 준다.   수평의 공간과 공간, 층과 층을 연결하는 계단은 한 계단 한 계단마다 모두 다른 높이를 가진다. 높은 곳에서는 멀리까지 한눈에 볼 수도 있고 야트막한 곳에서는 걸터앉아 쉴 수도 있다. 다양한 높이에서 공간을 보는 것은 시각적으로도 정서적으로도 새로운 자극이 되곤 한다.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이 다이어트와 운동에 효과가 있다는 사실이야 당연한 일이지만, 계단은 아이들에게 공간감을 학습하게 하고 공간지각능력을 키워주기도 한다. 3차원 인지 능력이 발달한 아이들이 창의성과 학습능력이 좋다는 연구결과가 있는 만큼 공간뿐만 아니라 인지능력도 풍부하게 만들어 준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 아이엑스디자인리빙 8월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