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piration - 덕수궁 돌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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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노일영   사진: 여인우 덕수궁 돌담길   숨 가쁜 서울의 시간, 그 속도에 지칠 때면 옛길을 찾자. 옛길에선 시간마저 천천히 흐른다. 느리게 흐르는 시간은 천천히 걸어야 느낄 수 있다. 덕수궁 돌담길. 의외의 걸음을 걷다.   덕수궁 돌담길을 걷는 것이 언제부터 낭만적인 일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고즈넉한 분위기의 돌담과 가로수, 그 담과 가로수가 만들어내는 그늘, 천천히 굽은 길을 걷는 정취는 누구에게나 비슷한 서정을 부른다. 오래된 돌담 아래를 걷는 연인의 마주 잡은 손은 낭만적이고, 군데군데 벤치에 앉아 가로수 그늘을 누리는 직장인들의 휴식은 여유로우며, 뜨거운 햇살을 맞으며 걷는 이들의 이야기 소리는 심지어 목가적이다. 익숙한 덕수궁 돌담길이지만 오늘은 왠지 다르게 걷고 싶었다.   점심시간, 쏟아져 나온 직장인들이 빠르게 길을 재촉한다. 여유롭게 산책을 즐겨도 괜찮을 텐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쫓기듯 잰걸음을 걷는다. 오래 묵은 돌담이 만들어내는 그늘과 그 사이로 쏟아지는 햇빛, 한 뼘 한 뼘 시시각각 변하는 담 자체의 질감과 비스듬한 풍경을 즐기기에 서울의 걸음은 너무 빠르다. 모든 길에는 길이 안내하는 속도가 있다. 덕수궁 돌담길이 안내하는 속도는 서울보다 느리다. 오늘은 길이 안내하는 대로 느리게 걷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돌담길을 지나 정동극장, 경향신문이 있는 방향으로 간다. 느리게 걷기 위해 사람들이 잘 가지 않는 길로 향했다. 돌담길을 따라 덕수궁을 한 바퀴 돌기로 했지만 길은 도중에 허리가 뚝 끊겨버렸다. 영국대사관이 1884년 부지를 사들인 이래로, 이 길을 따라 덕수궁을 도는 건 할 수 없는 일이 됐다. 그렇게 130년이 지났고 우리에겐 이 끊어진 부분에 대한 기억이 없다. 길을 막아선 철문이 높다.   다행히도 덕수궁 돌담길이 조만간 온전한 모습으로 돌아올 예정이란 소식이 들린다. 서울시가 영국대사관과 끈질기게 협의한 결과라고 한다. 170m의 길이 다시 일반에 공개될 것이다. 곧 우리는 살아서 이 길을 온전히 걸을 수 있다. 그리하여 걸어본 적 없는 길에 대한 기억을 이제야 다시 아이들에게 남길 수 있게 되었다. 끊어진 길이 열리면 꼭 이 길을 찾아 걸어보자. 19세기에 잃어버린 이 길을 비로소 반갑게 되찾아 걸어보자. 성공회 대성당, 담대한 유산   발걸음을 물려 길의 반대쪽으로 돌아갔다. 한 성당이 돌담길의 다른 끝에 있다. 성당의 원래 이름은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대성당’이지만 보통 성공회 대성당이라 불린다. 많은 이들이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서 있는 이 성당을 잘 알고 있지만 의외로 이 성당을 직접 찾는 이들은 적다. 주변에 많은 볼거리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성당이 돌담길과 너무 잘 어울려 눈에 잘 띄지 않기 때문이다.   설계자의 세심한 안배 덕분에 서양식 건물인 성당은 주변의 고궁, 한옥과 이질감이 없다. 보통 성당이나 교회는 하늘을 찌를 기세로 뾰족한 첨탑을 세운다. 하지만 성공회 대성당은 주변 풍경에 위해를 주지 않고 오히려 풍경에 자연스레 동화한다. 이 동화는 성당이 풍경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방식이다. 처마 장식에 또 기와지붕에 그 배려와 애정이 자연스레 묻어난다. 이웃과 친구를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을 건축적으로 표현한다면 이런 모습일까.   우아한 한식 기와와 은은한 스테인드글라스는 성당의 자태를 유려하게 만든다. 반면 밝은 화강암과 붉은 벽돌을 단단하게 쌓아 올린 건물은 꿋꿋하고 듬직하다. 성당 옆에는 뜬금없는 한옥건물이 있다. 경운궁 양이재라는 이름의 이 건물은 원래 황족과 귀족자제들을 교육하는 궁 안에 있던 수학원이었다. 그랬던 것을 일제강점기 대한성공회가 건물을 통째로 사들여 지금의 자리로 옮겨왔다. 성당 옆에 서 있는 양이재는 일제가 갈기갈기 쪼개어 팔아버린 대한제국의 유산이다.   1905년에 세워진 양이재는 문화재로 지정되어 냉난방 시설을 가동하는 것조차  번거로운 절차를 거쳐야 하지만 성당은 양이재를 살려두었다. 건물은 사람이 들어가 쓰지 않으면 금세 수명을 다하고야 만다. 그렇게 이 땅의 많은 고택과 고적, 고목이 불편하고 촌스럽다는 이유로 사라져 갔다. 수백 년이 넘는 목조건물들이 아직도 건재한 것은 사람이 계속 사용하기 때문이다. 양이재는 지금 대한성공회 서울교구의 사무실로 쓰이고 있다. 양이재가 아직 살아있는 것은 성당과 성당 사람들이 불편을 참고 사용한 덕분이다. 중명전, 비극의 테라스   정동극장과 미국대사관저, 예원학교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중명전이 있다. 정동극장 옆 조그만 골목으로 들어서야 나오는 중명전은 정동길을 많이 다니는 이들 중에서도 잘 모르는 이들이 많다. 한때는 왕의 거처로도 쓰였던 중요한 곳이다. 1897년 처음에는 황실 도서관으로 쓰이다 1904년 덕수궁 화제 이후에는 고종이 거처로 사용했다. 황실 도서관으로 쓰기 위해 서양식 전각인 중명전을 지은 것은 근대문물 수용에 앞장섰던 고종의 의지였다. 고종은 이곳에서 마시는 커피를 즐겼다.   고종의 의지와는 다르게 중명전에는 아픈 역사가 많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이곳에서 체결되었다. 이 협약의 결과로 대한제국은 명목상의 보호국, 실질적으로는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다. 고종이 그 협약의 불법성과 부당함을 알리기 위해 1907년 헤이그 특사로 이준 등을 파견한 것도 이곳 중명전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이후 일제는 헤이그 특사 파견을 빌미로 고종황제를 강제로 퇴위시켰다. 12년 후인 1919년 고종은 대한제국의 황제가 아닌 일본제국의 이태왕(李太王)으로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건물을 지나간 이야기만큼 건물의 이야기도 많지만 지금 중명전에서 그 아픔을 느끼긴 어렵다. 중명전은 다락방이 있는 2층 규모의 벽돌로 지은 서양식 건물이다. 아치 장식과 페디먼트 등 러시아 르네상스 건축적 특징을 보인다. 특히 건물 외부 3면에 있는 테라스가 아늑하다. 고종은 중명전을 거처로 쓰기 전에는 집무실로 쓰기도 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커피 마니아였던 고종은 이 테라스에서 대신들이나 외국 손님들과 커피를 즐겨 마셨다. 그가 아직 대한제국의 황제였을 때의 일이다.   중명전의 설계자인 러시아 건축가 사바찐(A. I. Sabatin)은 개화기 조선의 근대 건축물에 큰 영향을 줬다. 그는 1883년부터 러일전쟁으로 한국을 떠나기 전까지 22년간 건축분야에서 많은 자취를 남겼다. 러시아, 프랑스 등 외국 공사관과 손탁호텔, 명동성당, 러시아정교회성당의 설계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 특히 그가 남긴 독립문과 중명전은 우리나라 근대 건축 역사의 중요한 한 페이지를 차지한다. 어쩌면 건축사뿐만 아니라 근대사 그 자체이기도 하다. 사바찐은 러일전쟁으로 한국을 떠난 이후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주했다고 한다. 블라디보스토크는 한국과 가장 가까운 도시이다.   매일 보던 집 앞의 벚꽃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기억나지 않는 것은 한 번도 거기서 걸음을 멈추어 선 적이 없기 때문이다. 이 계절의 아름다움을 기억해내려면 반드시 잠시 멈춰야 한다. 덕수궁 돌담길 주변, 평소에는 잘 보이지 않았던, 가지 않던 곳을 천천히 돌담길만큼 느리게 걸었다. 느린 서울이 좋았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 아이엑스디자인리빙 7월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Inspiration - 어떤 문화와 예술의 거리. 대학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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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노일영   사진: 여인우 어떤 문화와 예술의 거리, 대학로 여기는 왠지 평화롭다. 떠들썩해도 시끄럽진 않고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도 썩 바빠 보이지 않는다. 골목길 작은 카페의 테라스 그늘에 앉아 한가로이 얼음을 녹여가며 커피를 즐길 넉넉한 시간이 있다. 테이크아웃 음료를 한 잔씩 손에 들고 걸어가는 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여유와 편안함이 느껴진다. 잔잔한 카페의 음악과 연인들의 웃음소리가 한 화음으로 들리는 것 같기도 하다. 공연 시간을 기다리며 줄을 서 있는 이들도 같이 온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즐거움에 지루해 보이지 않는다. 유명한 카페거리는 많지만 이렇게 여유롭고 평화로운 곳이 또 있을까. 날씨 좋은 날이면 왠지 골목골목 숨어있는 작은 카페를 찾으러 가고 싶은 곳. 구불구불한 골목을 천천히 걷는 즐거움이 있는 곳. 조금 덥더라도 실내보다는 테라스에 앉아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싶은 곳. 연극과 뮤지컬, 공개 코미디 공연으로 유명하지만 실은 다른 매력이 더 많은 곳. 대학로는 이런 곳이다.   어떤 문화, 어떤 예술, 어떤 거리   한동안 이 땅에도 미국의 브로드웨이와 같은 문화예술의 거리를 이룩하겠노라 정부와 기업, 학교에서 대학로에 많은 투자를 했다. 그 결과로 마로니에 공원이 말끔한 대리석 바닥으로 리모델링 되었고 열악한 시설의 소극장 대신 좋은 시설을 갖춘 큰 극장들이 많이 생겼다. 그런데 재밌게도 문화와 예술의 거리를 만들겠다고 했던 많은 일들은 원래 대학로에 있던 문화와 예술을 변두리로 쫓아만 냈다. 1987년에 세워진 대학로소극장, 1993년 문을 연 학전그린소극장과 같은 유서 깊은 소극장들이 문을 닫았고 거리와 공원을 무대 삼아 활동하던 예술가들은 대리석 바닥에선 자리를 찾지 못했다. 자신의 무대에서 밀려난 이들, 소극장과 대학로 큰길에서 밖으로 밖으로 밀려나던 이들을 이제는 무대가 아닌 브라운관에서 ‘소극장 집단 이주’라는 극단(劇團)적인 길을 찾고 있다는 뉴스로나 볼 수 있다. 문화예술의 거리를 만들고자 했던 이들이 원했던 문화와 예술 그리고 거리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어쨌든 덕분에 좋은 극장이 많아지고 거리가 깔끔해진 것은 사실이다. 다만, 좋은 극장이 많아지고 그만큼 공연의 수도 늘어났지만, 왠지 볼만한 공연이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채널이 300개가 넘는 케이블TV에서 볼만한 채널을 찾기가 어려운 것처럼 외적으론 풍부해졌지만, 내적으로도 다양해졌는지는 의문이다. 다행히도, 잘 보이지는 않지만, 대학로에는 다른 선택지가 있다.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전히 새로운 실험과 시도가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물론 그들을 위한 무대는 몹시 좁고 멀고 잘 보이지 않는다.   문화와 예술의 새로운 모양새   문화예술의 거리로 유명한 대학로는 오랫동안 한국의 브로드웨이라 불리며 연극과 뮤지컬, 공개 공연의 산실로 역할 해왔다. 대학로가 없었다면 송강호, 황정민, 설경구 같은 이름만으로도 신뢰할 수 있는 훌륭한 배우들과 그들의 무대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관객들은 수십 년간 객석에서 열광했고 응원했고 대신 감동을 얻어가곤 했다. 그러나 훌륭한 배우와 그들의 연기는 언제나 감동적이었지만 객석까지 감동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 훌륭한 공연을 보려면 몇 시간이고 좁은 자리에 빽빽이 무릎을 접고 앉아 후덥지근한 공기를 마셔야 했다. 다행히도 지금은 사정이 많이 달라졌다. 새로 생긴 극장에선 무릎을 당기지 않고도 편하게 앉을 수 있고 연신 눈에 들어가는 땀을 닦지 않아도 쾌적하게 연극을 볼 수 있다. 무대와의 거리가 조금 멀어졌지만 이런 안락한 변화라면 얼마든지 환영이다. 한 번 좋은 시설의 극장을 다녀오니 다시는 열악한 극장에 가고 싶지 않다. 뉴스에선 문을 닫는 소극장이 많고 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크다고 나오지만, 한편에선 더 많은 극장이 새로 문을 열고 있다. 꾸준히 늘어난 소극장은 대학로 지역에만 160여 개가 되었다. 뉴스에서 보던 것과는 사뭇 다른 얘기에 의아하다. 이를 두고 소극장의 난립이라 표현하는 이들도 있고 선정적인 작품으로 반짝 유명세를 얻거나 유명 작가와 배우를 섭외해 공연이 아닌 안전한 경영만을 목표로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며 폄하하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서비스 정신으로 무장한, 새롭게 지어진 극장에 다녀온 관객들이 다시 오래된 극장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은 다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유명하고 오래된 극장이 문을 닫는다는 소식에 별 감흥을 느끼지 못 하는 것은 그네들과 공유하는 추억이 없기 때문만은 아니다.   발랄하게 표현하는 법   요즘 대학로에서 제일 유명한 곳은 어디일까. 마로니에 공원? 쇳대 박물관? 모두 아니다. 요즘 대학로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벙커원 카페(BUNKER1 CAFE)다. 매일 색다른 강연과 문화행사가 펼쳐지는 카페. 이곳에선 철학자, 영화감독, 심리치료전문의, 기타리스트, 첼리스트, 플로리스트, 격투가, 여행 PD 등 정말 다양한 인사들이 하루에도 몇 번씩 시간을 나눠가며 카페 손님 혹은 청중과 함께 웃고 떠들며 강의라기보다는 즐거운 이야기를 나눈다. 팟캐스트 생방송이 만들어지기도 하고 북 콘서트가 펼쳐지기도 하며 주말엔 교회로 변신해 교인들이 모여 예배를 올리기도 한다. 난잡하고 어지럽기 그지없는 이상한 공간이지만 요즘 대학로에서 이보다 더 핫한 곳을 찾기도 어렵다. 항상 사람이 북적이고 종종 카페 주제에 자리가 모자라기도 한 이곳은 누군가 투자하고 이루어내고자 했던 문화와 예술과는 거리가 먼 것 같다. 인테리어가 특별히 아름답지도 않고 좋은 길목에 위치해 나도 모르게 들리게 되는 곳도 아니다. 카페가 인기 있는 이유는 그 발랄함과 명랑함에서 찾아야 한다. ‘가카모카’가 무슨 말인지 아는가? ‘모카라떼’와 대통령을 우스꽝스럽게 부르는 칭호인 ‘가카’를 합쳐 만든 말이다. 이 우스운 단어가 벙커원 카페에선 정식 메뉴 이름이다. 어설프고 우스꽝스럽더라도 유머러스하게 자신을 표현하는 카페의 정신이 바로 이 이상한 카페를 인기 있게 만드는 것이다. 언젠가는 대학로에서도 데모가 많이 있었다고 한다. 그 시대 젊은이들이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 데모였다면 이곳에 모인 지금 젊은이들이 자기를 표현하는 방법은 발랄한 유머러스함일 것이다. 어쩌면 격렬한 데모든 명랑한 풍자든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닐지도 모르겠다. 대학로를 대학로답게 만드는 것, 대학로의 문화와 예술이란 ‘표현’ 그것이다. 재기발랄한 표현이 넘치는 벙커원 카페를 찾아 이 시대의 젊음을 느껴보자.   보이지 않는 승부수   발랄하고 명랑해진 요즘에도 대학로에는 여전히 변하지 않은 것들이 있다. 문화예술의 거리라고 떠들썩해지기 전부터 대학로의 문화와 예술을 지켜온 이들. 모든 것이 변하는 시대이지만 제자리를 고수하는 이들이 있다. 학림다방은 30년 넘게 한 자리를 지키고 있다. 흘러나오는 음악도 여전히 그 시절의 LP판이다. 시대에 맞춰 메뉴도 바뀌고 찾는 손님도 바뀌었지만, 여전히 학림다방에선 지금의 젊은이들과 예전의 젊은이들이 함께 차를 마신다. 변한 것도 있고,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변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경영의 논리가 지배하는 시대에 무엇이 변해야 하는지, 무엇이 변하지 않아야 하는지를 선택하는 것은 각자의 몫일 것이다. 학림다방은 적어도 아직은 옳은 선택을 해온 것 같다. 학림다방에 오늘도 손님이 끊이지 않는 것이 그 결과일 테니 말이다. 생긴 지 오래되진 않았지만, 대학로에는 예전에나 볼 수 있었던 이음책방이란 작은 서점이 있다. 언젠가부터 대형 서점들이 여기저기 생기면서 동네 작은 책방들은 사라졌지만, 이곳은 여전히 나름의 감성을 간직하고 있다. 크고 화려하고 편리한 대형 서점만 이용해본 사람이라면 불편할 수도 있는 작은 서점이지만 개성과 철학으로 독자를 모으고 있다. 아직 서점의 선택이 학림다방의 그것만큼 옳은지를 선뜻 판단하기는 이른 것 같다. 시간이 더 지나고 판단해야 하겠지만, 부디 좋은 선택을 하기 바란다. 학림다방도 이음책방도 프랜차이즈 카페나 대형 서점에 비하면 다소 불편하고, 썩 좋은 점이 무엇인지 말하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향수와 애정만으로는 불편함을 이길 수 없고 가치나 의미와 같은 보이지 않는 말은 가격을 이길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네들이 아직 그곳에 있는 것은 그 매력을 발견하고 찾는 손님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 번쯤은 그 매력을 찾으러 학림다방과 이음책방이 있는 대학로를 찾아보자.   백열등과 형광등의 조화(調和)   대학로 바로 옆에 이제는 대학로보다 더 유명해진 이화마을이 있다. 세련됨이나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작고 오래된 주택들이 모인 이 마을은 원래 낙산공원 가는 길에 있는 조용한 동네였다. 한때는 재개발을 추진했으나 무산되는 등 부침을 겪었고 결국 일본강점기에 지어진 건물들이 아직도 그대로 남았다. 이 조용한 마을이 이제는 국내외 관광객을 끌어모으는 유명관광지가 된 것은 몇몇 예술가들이 마을에 벽화를 그리고 나서부터였다. 오래되고 남루한 벽에 벽화가 그려지면서 심심했던 마을에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했고 사람들이 찾아오면서 마을이 변하기 시작했다. 구불구불한 골목길, 높은 계단과 언덕길을 지나야 찾을 수 있는 마을에 카페와 갤러리가 들어섰다. 관광객들은 노점상이 없어 걷기 좋은 거리, 크고 세련된 건물과 건물에 들어선 유명 커피숍, 문화예술의 거리 대학로보다 땀을 흘리며 한참을 걸어 올라야 있는 작은 마을과 그 마을의 허름한 벽에 그려진 벽화를 더 좋아했다. 작은 마을에 생긴 카페엔 사람들이 북적이고 저녁이면 일찌감치 문을 닫던 동네 슈퍼마켓은 조금 더 늦게까지 문을 열고 누런 백열등을 하얀 형광등으로 갈아 끼웠다. 마을이 변한 것은 예술가들 덕분이기도 하지만 마을이 예술가들의 그림을 받아들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실은,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을을 찾는 관광객들의 덕분이기도 하다. 어쩌면 대학로에 들어선 좋은 극장들과 유명 카페처럼 누군가 이화마을을 어떤 문화예술의 마을로 만들어 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3~4년만 지나면 볼품없어지는 벽화를 늘 새롭게 유지해 생생한 마을을 만드는 일이 마을과 예술가들 공동의 노력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란 것을 잊지 않는다면, 마을의 변화가 실은 신비한 조화(造化)가 아닌 모두의 조화(調和)에서 나왔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면 마을은 예술과 경영의 사이에서 균형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특별하게도 평범한 거리   언제 가도 대학로는 참 평화롭다. 한때는 데모도 많이 하는 시끌벅적한 곳이었다지만 지금은 오히려 쉼표에 가까운 한산한 인상의 대학로. 대학로라는 장소를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탓에 아주 오래 지켜보지는 않았지만 내가 본 대학로는 늘 평화롭고 여유로웠다.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인지라 홍대 앞이나 건대 앞의 소란스러움에 적응하지 못하는 내게는 대학로처럼 넉넉하고 여유로운 곳이 필요했다. 야한 옷을 입은 사람보다는 차라리 이상한 옷을 입은 사람을 보는 게 편한 내게는 화려한 클럽보다 대학로의 평화롭고 수더분한 밤이 더 좋다. 거리에 사람이 많아도 왠지 피곤하지 않고 부대끼지 않고 걸을 수 있는 대학로가 좋다. 골목골목 숨어있는 아기자기한 카페를 찾는 즐거움도 좋다. 커피를 마시러 가서는 카페보다 많은 옷가게 사이를 헤매는 것이 어려운 내겐 카페거리인지 쇼핑타운인지 알 수 없는 거리보다 대학로가 마음 편하다. 눈부시도록 광을 낸 번쩍이는 차를 보면 왠지 어색한 나는 적당히 묻은 먼지만큼이나 사람 손길이 묻은 차가 있는 대학로가 좋다. 청년과 중년이 함께 앉아 커피를 마시는 것이 어색하지 않은 거리, 어린 학생들과 노인들이 같은 공원에 앉아있는 것이 당연한 거리, 나란히 서 있는 오래된 분식집과 세련된 카페가 조화로운 거리. 대학로가 좋은 것은 어쩌면 대학로가 특별하지 않아서 일지도 모르겠다. 대학로에 가면 여유와 평화, 넉넉하고 잔잔한 조화가 있다. 자세한 내용은 월간 아이엑스디자인리빙 6월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Inspiration -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국제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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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노일영 아직, 끝나지 않은 이야기, 국제시장 영화 <국제시장>은 막을 내렸고 덕수와 그의 삶을 담은 이야기는 끝이 났지만,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 있다. 부산에 있는 국제시장과 시장을 찾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이야기는 여전히 숨 쉬고 있다. 온 국민의 사랑을 받은 영화 <국제시장>을 보며 국제시장의 진짜 모습은 어떨지 궁금해졌다. 영화 <국제시장>과 영화의 배경인 국제시장을 잊을 수 없는 이들을 위해 부산으로 떠나보자.   부산역에 서서 시카고를 생각하다.   한국에 도시가 서울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독자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혹은 부산이 너무 멀다고 생각하는 독자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한국에는 크고 유명한 도시가 많다. 특히 부산은 외국인들에게는 서울만큼이나 유명한 도시이다. 외국의 한국 여행안내 책자에선 서울만큼이나 부산을 비중 있게 다루곤 한다. 우리가 시카고와 샌프란시스코를 지방도시라 생각하거나 촌동네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냥 미국이라고 생각하듯이 외국인들은 서울 못지않게 부산을 곧 한국이라 여긴다. 그런데 우리는 어쩌면 부산을 너무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워싱턴DC에서 시카고까지는 약 1,000km가 떨어져 있다. 그에 비하면 서울과 부산은 그 절반도 안 되는 거리에 있으니 정말 가깝지 않은가? 부산은 멀지 않다. • 부산역 광장의 사진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틀림없이. 어떤 이유에서든 부산에 오는 사람들은 꼭 한 번씩 사진을 찍게 되는 곳이다. 특히 기차를 타고 부산에 도착했다면, 거의 틀림없다. 다들 비슷비슷한 사진을 찍어야만 하는 뻔 한 곳임에도 불구하고, 그 흔함과 진부함을 알면서도 왠지 그렇게 되는 무언가가 있다. 흔하고 진부한 것 같지만 어쩐지 외면할 수 없는 곳, 부산은 그런 곳이다.     이방인의 기억을 나르는 부산의 전철   부산에서 전철을 타는 건 특별한 경험이다. 부산의 전철은 30년의 역사만큼 쌓인 이야기도 많고 그만큼 간직하고 있는 오랜 풍경도 많다. 이제 서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종이로 된 전철표도 그중 하나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영영 볼 수 없게 된 종이 전철표가 전국에서 유일하게 부산에만 남아있다. 이 종이 전철표 한 장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담겨있을까. 마음 깊이 묻어둔 풍경, 그 시절로 가는 표가 있다면 분명 이렇게 생겼으리라. ‘삑’하고 찍히는 교통카드로는 갈 수 없는 곳이 있다.   이 종이표가 특별한 것은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종이표를 써본 사람은 알겠지만, 전철역에서 나올 때는 개찰구에서 표가 다시 나오지 않는다. 돌아오지 않는 종이표에 메모를 남겨두었던 기억이 있다. 물론 표와 함께 메모도 돌아오지 않았다. 어떤 메모였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오래된 일이지만, 망연자실하던 내 마음에 대한 기억이 남아있다. 돌아오지 않는 것도 있지만 남아있는 것도 있기 마련이다. 부산 전철엔 종이표가 남아있고 전혀 예상치 못했던 내 지난 이야기도 남아있다. 낯선 장소에서 오래된 기억을 발견하는 건 흔한 일이 아닌지라 괜히 부산이 애틋해졌다.   자갈치 시장은 손이 곱지 않다   어린 시절 어머니의 손을 잡고 시장에 가면 어머니는 꼭 생선을 한두 마리씩 사고는 하셨다. 어머니께서 생선가게 주인아주머니와 이런 저런 얘기를 하고 나면 아주머니가 커다란 도마 위에 생선을 올려놓고 도마만큼이나 커다란 칼로 생선을 툭툭 ‘끊어’주곤 했다. 언제부터였을까, 그렇게 가게 주인과 얘기를 나누고 생선을 툭툭 ‘끊어’주는 모습을 볼 수 없게 된 것이. 아마 우리 집이 아파트로 이사를 하고 난 이후였을지도 어쩌면 집 근처에 대형마트가 생긴 이후일지도 모르겠다.   자갈치 시장엔 여전히 생선을 ‘끊어’ 파는 사람들이 있다. 반가운 마음에 가까이 보았더니 생선이 아니라 생선과 칼을 잡은 고무장갑이 먼저 보였다. 그 고무장갑 안에 어떤 손이 들어있을지 궁금했던 것은 여기저기 카메라를 들이대던 어린 관광객의 하얗고 고운 손이 인상 깊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문득 놀라웠던 것은 이곳이 나와 같은 관광객들에게는 그저 구경거리이고 관광지일 테지만 누군가에는 삶의 터전이고 생업의 전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까닭이다. 다시 둘러본 시장에는 손님보다 관광객이 많았고 검은색 비닐봉지보다 검은색 카메라를 든 손이 더 많았다. 카메라를 든 손은 하나같이 하얗고 고왔다. 카메라가 아닌 칼과 생선을 쥔 저 손이 거치리라 쉽게 짐작한 것은 검은색 비닐봉지를 든 다른 손들이 다들 거칠었기 때문이다. 생선과 칼, 비닐봉지가 들린 시장의 손은 곱지 않았다, 우리 어머니들만큼이나.   향수가 지독한 거리   시장을 둘러보니 여기저기 쪼그리고 앉아있는 어르신들이 보였다. 수첩을 정리하는 할머니도 계셨고 앉아서 생선을 자르는 아주머니, 담배를 피우는 분도 계셨고 핸드폰을 보는 분도 계셨다. 덕수의 어머니가 작은 방에 쪼그리고 앉아 바느질하던 모습이 기억났다. “막순이 얘기하면 맘이 찢어지지만……. 엄마는 그래야 하니까…….” 엄마는 그래야 한다고 담담히 말하던 덕수의 어머니와 여기저기 앉아있는 누군가의 어머니들이 겹쳐 보였다. 별일 아니겠지만, 아마 그들은 즐겁거나 아무렇지 않은 하루를 보내고 있겠지만, 괜히 마음이 찡한 것은 언젠가 엄마는 그래야 한다며 슬픔을 꾹 누르고 살았을 우리의 어머니들이 여기 시장에 너무 많아서 일 것이다, 덕수네 어머니가 그러했듯이 말이다.   자갈치시장에선 바닷냄새가 났다. 바닷냄새라고는 하지만 해수욕장에서 나는 냄새와는 사뭇 다른 냄새다. 여기선 좀 더 진하고 원초적인, 건강한 냄새가 났다. 이곳은 영화 <국제시장>에서 덕수가 한때 일하던 곳이다. 독일로 떠나기 전, 성긴 피부의 덕수는 이곳 자갈치 시장에 잘 어울렸다. 순수하고 건강한 그에게 이보다 더 잘 어울리는 곳이 있을까. 어쩌면 이 바닷냄새는 덕수의 냄새일지도 모르겠다. 바닷가라서, 부산사람이라서 또는 남자라서 나는 냄새가 아닌, 순수하고 건강한 사내이기에 나는 냄새. 지금 자갈치 시장을 터전으로 삼은 이들에게도 같은 냄새가 난다. 순수하고 건강한 냄새, 내 손을 잡고 시장을 돌던 어머니의 냄새, 어머니와 흥정하던 시장 아주머니의 냄새. 이곳엔 향수가 진하다.     국경을 횡단하는 사다리   자갈치시장에서 국제시장을 가려면 BIFF광장을 지나야 한다. BIFF광장으로 가는 길은 횡단보도 하나로 나뉘어있다. 자갈치시장 쪽 횡단보도에 서서 길 건너 BIFF광장 쪽을 보니 화려하고 번화한 모습에 갑작스레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영화에서 독일을 다녀온 덕수는 마침내 국제시장에 있는 꽃분이네를 인수한다. 그의 인생에 가장 드라마틱한 상승이 이루어진 순간이 아니었을까. 자갈치시장에서 상자를 만들어 나르던 덕수가 국제시장 꽃분이네의 사장님이 되는 동안, 이국의 갱도에서 보낸 그 긴 시간 동안, 그가 건넌 것은 결국 이 횡단보도 하나였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한 걸음, 한 걸음 꽃분이네로 향하던 그의 길이 얼마나 고된 길이었을까, 길 건너 높이 솟은 건물들이 멀게만 느껴졌다. 발밑에 그려진 사다리 하나를 건너기 위해 목숨을 걸고 돈을 벌어야 했던 덕수를 생각하니 이 길을 밟는 내 걸음이 너무 가벼운 것은 아닐까, 괜한 자책이 들었다. 횡단보도 하나를 건너는 일이 마치 이국으로 건너가는 길인 것처럼, 높은 계단을 오르는 것처럼 어색하고 무겁기만 했다.   길을 건너 BIFF광장에 들어서면 영화 속 달구가 만든 대영시네마가 있고 그 앞에 번화한 시가지와 수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번화함과 화려함만을 놓고 보면 사실 서울의 여느 거리와 다르지 않다. 번화하고 복잡한, 외국인과 내국인이 함께 북적이는 모습은 서울의 명동 거리와 구별하기 쉽지 않은 정도이다. 부산이 처음인 사람들은 이런 모습에 놀라곤 한다. 지방이라는 생각에 서울과 다른 무언가를 기대했던 사람들이 적잖이 실망하는 일도 흔하다. 그래서일까, 일상과 다른 무언가를 찾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많은 이들이 자신의 일상과 다를 바 없는 다른 이들의 일상에 쉬이 지쳐버리는 것은. 일상에서의 탈출을 위해 부산을 찾는 이들에게 부산은 어쩌면 친절한 도시가 아닐 것이다. 자갈치 시장에서 느꼈듯, 부산 또한 많은 이들의 일상으로 가득한 도시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서울을 떠나 서울로 돌아가는 길목에 있는 부산이지만, 덕수에겐 북국의 갱도와 남국의 전쟁터에서도 언제나 돌아가야만 할 곳, 집이 바로 부산이니 말이다. 어머니의 밥상과 아내의 자리   국제시장은 특별한 인사말 하나 없이 뭉근히 우리를 반긴다. BIFF광장의 많은 볼거리를 보며 사람들 사이를 정신없이 걷다 보면 문득 변해버린 풍경을 느끼게 된다. 국제시장에 들어선 것이다. 국제시장이 우리를 맞는 법은 그렇게 말없이 늦게야 들어온 자식에게 조용히 밥상을 내는 어머니를 닮았다. 자갈치시장에서 BIFF광장으로 들어서며 느꼈던 경계와 월경의 기분을 느낄 새도 없이 들어선 국제시장.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광장이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시장인지 알 수 없는 경계의 부재와 어머니의 손금처럼 깊이 팬 골목들이 국제시장의 시작이고 끝이다. 헤아릴 수 없는 어머니의 그 마음처럼. 쉽지만 복잡하고, 어렵지만 단순하다.   덕수가 처음 가족과 함께 피난을 떠나던 순간부터 더는 아버지를 기다릴 힘이 남지 않게 된 날까지 국제시장은 늘 그곳에 있었다. 누구에게나 제 생보다 긴 시간은 영원인 것처럼 그에게 국제시장은 영원이었으리라. 그래서였을까, 언제나 덕수가 부산으로 돌아간 것은. 독일에서 또 베트남에서 돌아왔을 때도 그의 귀국길은 부산으로 향했다. 반드시 돌아가야 하는 이유가 있는 곳, 부산이 그랬다. 덕수를 기다리던 어머니의 자리가 어느덧 부인인 영자의 자리로 바뀌는 동안에도, 독일로 또 베트남으로 떠났던 덕수가 결국엔 돌아와 다시 아버지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국제시장은 늘 거기 있었다. 누구에게나 기다림은 어려운 일이다. 누군가에게 반드시 돌아가야 하는 이유가 된다는 것은 반드시 기다려야 하는 약속과 함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힘든 약속을 덕수는 그리고 어머니와 아내 영자는 평생을 지켰다, 이 국제시장에서, 이 부산에서.   정상에 오르는 방법과 헤아릴 수 없는 유산   용두산 공원에는 산을 오르는 에스컬레이터가 설치되어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산을 오르는 것은 꼭 우리의 압축성장과 닮았다. 안전하게 산에 오르려면 산을 둥글게 둘러 올라야 하지만 빨리 오르기 위해선 직진으로 올라야 한다. 더 위험하고 더 힘들지만 빠르게 오르려면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네 어르신들의 삶이 그랬다. 안전하고 편하게 살기보다 힘들고 위험해도 빨리 잘 사는 세상을 자식에게 남기고자 택한 어쩌면 택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은 성공이라는 산을 처음부터 끝까지 꿋꿋하게 직진해 올라야 했다. 그네들이 힘겹게 산에 오르며 남겨준 유산 덕에 편하고 빠르게 산에 오를 수 있게 되었으니 고맙기 그지없는 일이다. 그러나 용두산에 오르는 길이 우리네 부모님들의 역경과 유산을 그저 관람하는 길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에겐 그들의 사정이 우리와 달랐음을 인정하고 공감하고 고마워해야 할 의무가 있다.   덕수가 성공의 사다리를 오르는 동안 많은 것이 변했지만 변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꽃분이네에서 만나자던 아버지와의 약속과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평생을 고집스레 지켜온 꽃분이네만은 눈부시리만치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도 끝내 변하지 않고 남았다. 꽃분이네를 지켜온 덕수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그는 왜 그리도 바보같이 꽃분이네를 포기할 수 없었을까. 아마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가 평생 포기하지 않고 지켜낸 것은 꽃분이네가 아니라 가족이었음을. 가족, 오직 가족뿐이었던 덕수의 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인자, 못 오시겄지.’ 황혼의 길녘에서 노인은 오랜 고집을 꺾는다. 덕수가 마침내 꽃분이네를 팔기로 했을 때, 그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헤아리기엔 너무도 아득한 회한이리라. 장성한 자식들의 성화에 못내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와의 약속을 무너뜨릴 때 그가 남몰래 뱉은 말 한마디가 마음에 길게 남는다. “아버지 내 약속 잘 지켰지예, 이만하면 내 잘 살았지예, 근데 내 진짜 힘들었거든예.”     낯선 기억이 머물 자리   용두산 공원을 나와 내려가는 길에, 푸르게 난 새잎보다 그 아래 쌓인 낙엽과 깨진 돌멩이가 더 눈에 들어왔다. 영화 <국제시장>에서 뿐만 아니라 영화에서 부산은 늘 과거의 모습으로 나왔다. <친구>에서도, <범죄와의 전쟁>에서도 그랬고 또 다른 영화들에서도 그랬던 것 같다. 지금은 고층건물이 즐비한 현대적인 도시인데도 우리가 영화에서 보는 부산이 늘 예전의 모습인 것은 어쩌면 저 낙엽과 돌들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새 건물이 들어서기 위해선 헌 건물이 사라져야 하고 새잎이 나기 위해선 헌 잎이 떨어져야 한다. 서울은 그랬다. 낯선 건물과 이름들이 들어서며 익숙했던 것들이 사라져 갔다. 하지만 부산에는 아직 남은 것들이 많다. 떨어진 낙엽조차 머물 자리 없는 서울에선 찾을 수 없는, 낙엽이 쌓이고 깨진 돌이 남을 자리가, 우리의 기억이 머물 자리가 부산엔 아직 많이 남아있다. 여전히 그리고 끝내 부산이 아름다운 것은 우리네 묵은 기억이 쌓인 까닭이리라.  자세한 내용은 월간 아이엑스디자인리빙 5월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